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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람 Jun 12. 2023

요트를 타고 하늘을 날다

2022 새만금컵 국제요트대회 출전기 (1)

누구에게나 살면서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요트선수들에게 살면서 가장 기뻤던 기억이 뭐였냐고 물으면, 모두 하나 같이 이렇게 답한다.


"처음으로 시상대에 올라갔을 때!"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두 번이나 딴 감독님조차, 가장 기뻤던 것은 중학교 때 처음으로 시상대에 올라가 3위 메달을 땄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 이야기의 뜻을 새만금컵 국제요트대회의 시상대에 올라간 순간,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이것은 킬보트를 탄지 3개월 만에 요트대회에 처음으로 전해 트로피를 받은 후아팀의 이야기이다.




전북 부안에 있는 격포항은 요트 몇 대와 어선 수백 대가 즐비하게 늘어선, 어항 겸 요트계류장이 있는 곳이다. 한국의 마리나 중에서는 이런 곳들이 꽤 있다. 기존 항구 옆에 요트를 계류할 수 있는, 수심이 깊은 구역을 만들어놓고, 대회 때가 되면 어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요트 드나들며 경기를 하는 것이다.



대회 준비를 위해 격포항에 도착한 민진영과 나를 맞아준 것은 비릿한 항구 냄새, 크레인, 그리고 그 크레인이 요트를 바다로 옮겨준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왜 청천벽력이냐면, 그 배에 우리가 실려서 하늘을 날아 바다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서해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우리가 도착한 시간대에는 요트 진입용 경사로인 '슬립웨이'가 너무 가팔라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트대회를 위해 참가한 배들은 크레인으로 마스트를 들어 올려 조립하고는, 천으로 된 끈 두 줄 위에 배를 얹은 후 그대로 10미터 정도 하늘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20미터를 내려가 바다 위에 사뿐히 놓였다. 




배에 실린 채로 크레인에 들려 하늘 위로 올라가는 기분은, 정확히 이것이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오!!" 그 당시 나는 너무나 겁에 질려서 두려움을 상실한, 매우 독특한 정신상태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민진영과 나는 얼떨떨한 상태에서 하늘을 날아간 요트가 바다에 닿자마자 크레인에 걸려있 끈을 풀고, 엔진을 내리고, 러더를 조립하고, 시시각각 항구의 벽을 향해 돌진하는 요트를 보호하기 위해 미친 듯이 라이프라인에 펜더(완충재)를 매고, 결국은 눈앞에 다가온 항구 벽을 발로 밀고 있는데 위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뭐 해, 지금! 엔진 켜!"



엔진을 켜서 러더를 조정해 항 밖으로 나가는 것은 항상 스키퍼 민진하의 몫이었기에 민진하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엔진을 켜야 하는 민진영과 나는 우왕좌왕했고, 어찌어찌 시동줄을 당겨 부릉 소리가 나자 비로소 안도하고는 계류장으로 향했다.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6개월쯤 늙은 기분이 들었다.


선수로서 처음 참가해 본 요트대회 풍경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다들 바쁘게 뭔가 접고 펴고 붙이고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있는데 거의가 모르는 사람들이었. 우리만 빼고는 다들 친한 듯,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이럴 땐, 딱 한 명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지난번 부산슈퍼컵 때 얼굴을 익혔던 양호엽 선수가 같이 연습 세일링을 나가자고 했을 때 민진영과 나는 얼른 따라나섰다.



이번 대회에는 오로지 선수들로만 구성된 파이스트 한 척이 있었는데, 양호엽 선수도 그 팀의 일원이었다. 이는 한 기업에서 홍보 삼아 구성한 팀으로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만 세 명에 전원 실업팀에서 뛰고 있는 몬스터급 엔트리였다.


평소라면 말도 붙여보기 어려운 선수들과 배를 탄 우리는 바짝 얼어 있었다. 반면 선수들은 반쯤 놀러온 분위기였는데, 이런 대회는 본인들의 커리어와 무관했 때문이다. 선수들은 민진영이 배 앞머리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우맨 역할을 하자 그 움직임을 흥미롭게 지켜보기도 했다. 1~2인승 딩기에는 바우맨이라는 역할이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역할인 집 트리머는 2인승 딩기에서 '크루' 역할을 맡는 선수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그래서 한 선수가 나에게 집 시트를 건네며 "집 트리머 한 번 해보세요."라고 했을 때 내 몸과 마음은 긴장으로 삐걱다. 나중에 바우맨 역할을 하던 선수가 말하기를, "배가 잘 나가다가 갑자기 흐름이 툭 끊겨서 뒤를 돌아보니까, 파란머리 누님이 열심히 시트를 당기고 계시더라고요." (그렇다. 선수들은 전원 나보다 연하였다)


선수들의 화려한 몸놀림을 눈앞에서 보니 나는 더 자신이 없어졌다. 우리는 초짜 중의 초짜인데, 내일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대회에 나오는 건 역시 시기상조 아니었을까. 하지만 내가 겁먹었거나 말거나 우리 팀원들은 격포항에 도착했고, 날은 저물었고, 대회 첫날의 해는 뜨고야 말았다.


격포항은 채석강이라는 관광지였지만 눈에 들어올리가...



보통 대회 첫날은 아침에 스키퍼 미팅이라는 것을 하고, 그때 무전기를 지급하면서 당일의 날씨와 기타 특이사항을 공지한다. 스키퍼 미팅이 끝난 후 보통 1~2시간 안에 경기가 시작하기 때문에 다들 곧바로 바다로 나간다. 계류장에서 경기수역까지 엔진을 켜서 가는 데만도 2~30분이 걸리고, 미리 수역을 항해해 보면서 그날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 조류의 특성은 어떤지, 세일은 세팅이 잘 됐는지 점검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세팅이 까다로운 제네이커가 꼬이는 일이 많아서, 대회 전에는 꼭 미리 나가서 제네이커를 펼쳐보고 점검해야 했다. 세일 점검이 끝나면 그날의 마크 위치를 확인하고, 한번 마크까지 바람을 타고 항해를 하고 돌아와 보면 풍속이 어느 정도인지, 바람이 무거운지 가벼운지도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서해바다에서 항해를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었는데, 특히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서 가만히 있어도 배가 밀려가는 것이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출발을 잘하기 위해서 파도가 몰아치는 울진에서 무지하게 연습을 했는데, 여기는 파도가 없는데도 배가 순식간에 떠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가 한 곳에 제대로 멈춰 있지도 못하는 사이 경기 시작 5분 전을 알리는 깃발이 올라가고 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초시계를 맞추고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스타트라인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출발 2분 전이 되자 여기저기서 집 세일을 올리면서 달리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1분 이 되자 배들이 서로 가까워지며 고함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전한 RC정에서 관람만 할 때도 꽤 무서웠는데, 이제는 내가 그 배 위에서 시트를 당기면서 속도를 내고 있자니 나는 다시금 '너무 무서운 나머지 두려움을 상실한' 정신상태로 접어들었다. 



그 뒤로 무얼 어떻게 했는지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냥 우리는 배우고 훈련한 대로 했다. 풍상으로 갈 때는 죽어라 밖으로 몸을 내보내 무게중심을 잡았고, 마크를 돌면서는 정신없이 제네이커를 올려 바람을 받으며 항해했다. 특히 나는 풍하로 가면서 제네이커를 콘트롤하는 동안에는 잠시도 세일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미세한 콘트롤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정신을 차렸을 즈음 우리는 이미 피니시 라인을 지나 있었다. 그때 민진영이 외쳤다.


"우리, 2위예요!"



2위? 2위라니? 1위가 올림푸스 에 있는 선수님들의 배였음을 고려하면 이건 사실상 첫 번째로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진짜야? 2위? 와, 우리 좀 하나 봐! 기분이 얼떨떨했다.


물론 새만금컵은 부산 슈퍼컵 보다 출전하는 배도 적고, 이번에는 부산 때와 달리 파이스트에게 유리하게 작은 배들과는 클래스가 분리된 데다가, 우리 배는 새 요트라서 거침없이 잘 나가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배가 좋다 해도 이건 엄연한 국제요트대회, 요행으로 2위를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느이들, 선수 수준은 아니지만
동호인 레벨에선 제법 하는 편이야."



감독님말이 격려 차원에서 하는 빈말이겠거니 했는데, 요트선수란 요트실력에 있어서만큼은 립서비스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출전한 대회의 첫 경기에서 우리의 실력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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