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라걸> 시사 리뷰
극장에 가며
충분보다는 불충분에 가까운 삶을 지나왔다. 어떤 결핍은 아무리 애를 써도 조금도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할 때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는 했다. 근사한 신발을 신고 저 멀리 달려 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간격을 벌리고 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내 툭툭 털고 일어섰다. 흙 묻은 운동화를 고쳐 신고 신발끈을 다시 꽉 조여 매고서 숨을 골랐다.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느끼며 떠올린 건 단 하나였다.
결승선. 결승선이었다. 지금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저들과 다른 출발선이 아닌, 그 치사스러운 불평등이 아닌 누구에게나 멀리 놓여 있는 단 하나의 결승선이었다. 지독하게 외롭고 지독하고 고독한 길을 선택한 나에게 낙심이 아닌 희망이 되어주는 것은 오직 그 하나였다.
집필 중에 있는 작업 일지 <내 새벽의 몫은 아침에 찾아오지 않는다>에 수록된 글이다. 살아내는 삶이 길어질수록 극명해진 건 내 삶의 결핍들이었다.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고, 하기로 선택한 것은 낙담 아닌 열심이었다. 쉬이 채워지지 않기에 멈춰있을 시간이 없었다.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떤 절망도, 비애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경주를 뛰어보기도 전에 패배의 그림자가 찾아오려고 할 때마다 나는 나와 같은 결핍에 놓여 있는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고요한 질주와 승리를 떠올리고 나면 내 결핍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됐다. 없어서 가능했던 승리를 꿈꾸게 됐다. 오늘 내가 떠올린 결핍의 승리는 155년 '멜버른 컵' 역사상 최초의 여성 우승자, 미셸 페인. 그녀의 삶을 담아낸 영화 <라라걸>이다.
영화 <라라걸 : 라이드 라이크 걸>의 미셸 페인의 삶을 -결핍과 +승리, 모순적인 관계의 단어로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경마, 그중에서도 가장 권위적인 대회 호주 멜버른 컵에서 '여성'으로서 이뤄낸 승리는 모순적이며 그 무엇보다도 큰 충격과 깊은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미셸 페인은 페인 패밀리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많은 형제자매들과 북적거리는 성장기를 보냈지만, 그녀는 생후 6개월에 떠난 엄마에 대한 기억은 잘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다정한 엄마와 엄한 코치의 모습을 모두 가진 커다란 나무 같은 아버지가 있다.
말 농장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모두 경마 선수로 훈련시킨 아버지 패디는 여성으로서 미셸이 부딪히게 될 한계를 알고 있지만, 끊임없는 관심과 채찍질로 그녀를 훈련시킨다. 그녀가 제 한계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어깨너머로 들었던 "중요한 건 제 자신에게 얼마나 베팅하느냐야."라는 말과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야. 인내심이지."라는 조언 때문이었다.
엄마의 사랑을 느껴본 적 없는 미셸을 그 누구보다도 애틋해하지만, 그녀의 열정과 능력을 알아봤기에 혹독하고 냉철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아빠 페디는 미셸의 선택을 그 누구보다도 지지하는 사람이 되어준다.
말을 잘 탔던 건 오빠보다 언니였지만, 선수로 발탁되어 집을 떠난 건 오빠였다. 침대보다도 마구간에서 잠드는 게 편할 정도로 말을 잘 알았고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 아래 매일 실력을 쌓았지만, 경주는 아직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경주를 사랑하던 언니가 결혼과 동시에 선수 생활을 접는다는 게 말이 안 됐다. 형부는 멜버른 컵을 준비하는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미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지역에서 열리는 경주란 경주에서 실력을 입증받은 자신이 배정받은 락커룸은 음료 매점 창고였고 어렵고 거머진 순위를 두고 실격이녜 마녜하는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실력과 비례하지 않는 뛸 수 있는 경주의 수. 경주를 뛸 수만 있다면 그녀에게는 수천 킬로의 거리도, 무리한 체중 조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마의 세계에서 그녀의 성별은 문제였다. 겪을 필요 없는 치욕과 희롱을, 끊임없는 견졔를 견뎌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굴복하지 않는다. 세계가 그녀를 밀어낼수록 그녀는 더욱 세계 밀어붙였다. 여자라서 싫다면, 여성이 보여줄 건 포기가 아니라 그들을 뛰어넘는 집념과 능력인 것이다. 그녀는 시끄러운 밖이 아닌 고요한 내면에 집중했다. 숱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내내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정말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인내심이야."
승리를 향한 끝없는 집념은 미셸을 곤경에 빠뜨렸다. 남성 선수들에게 다양한 권리와 과정들이 그녀에게는 매 순간 싸워 성취해야만 하는 시험과 같았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으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그녀는 낙마 사고를 겪고 뇌사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제 이름의 스펠링도 완벽히 기억해낼 수 없는 그녀였지만, 경마에 관한 모든 지식은 온전히 기억해낼 정도로 고난 속에서도 그녀의 경주를 향한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결국,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했던 재기에 성공한다. 그녀의 공백이 마이너스의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했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미셸은 그 시간들을 더 굳은 결단과 끈기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고난과 차별을 극복해낸 건 단 하나, 그녀의 결핍과 그것을 뛰어넘는 노력이었다. 그녀는 모든 방해와 조롱을 딛고 마침내 155년 '멜버른 컵' 역사상 최초의 여성 우승자가 되고 만다. 그녀는 말한다. "여자는 힘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방금 우리가 세상에 이겼네요." 긴 세월 지나와야 했던 그 모든 고독과 역경을 대변하는 한 줄의 소감은 많은 이들에게 전율을 선사한다.
그녀의 우승 앞에 새겨진 <최초>라는 강렬한 단어는 스포츠의 소수자로서 감당해야 했던 차별을 딛고 나아간 '여성에게만' 허락된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다.
승리의 주역 1, 오빠 스티비
영화 <라라걸>이 더욱 사랑스럽고 감격스러운 이유는 그녀의 승리의 숨은 주역들에게도 결핍이 있다는 것이다. 미셸이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도록 곁에서 헌신한 첫 번째 주역, 그녀의 친오빠 스티비는 다운증후군이라는 신체적 불편함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재치 있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페인 패밀리를 끈끈히 결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함께 해온 말들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만 최고의 마필 관리사가 되었고 미셸의 곁에서 늘 조력자이자 조언자가 되어주었다.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며 보듬어 줄 수 있는 친구로서 극한의 스트레스를 극복해야 하는 미셸에게 심리적 안정을 안겨주기도 하며. (극 중 스티비는 실제 미셸의 친오빠로서 자신의 역을 연기하였다.)
승리의 주역 2, 파트너 프린스
멜버른 컵의 우승자는 미셸이었으나, 사실 그녀의 소울메이트와도 같았던 '프린스'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경주조차 뛸 수 없었을 거다. 부상을 딛고 재기한 미셸의 눈에 우연히 들어온 부상 마 프린스. 그녀는 한눈에 자신과 닮아 있는 프린스를 알아보고 연민과 동시에 강한 애정을 느낀다. 그때부터 시작된 환상의 파트너 프린스와의 경주들에서 미셸을 높은 순위를 이어나간다. 그 누구도 거들다 보지 않았던 부상 마 프린스는 미셸과 함께하며 그 누구든 욕심 내는 최고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녀의 우승이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녀 자신이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었기에 가능했던 우승이라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우승 뒤에 숨은 주역 스티비와 프린스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연약한 결핍 뒤로 꺼지지 않는 순수한 열망과 끈기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공감과 응원을 보내게 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작은 상처와 아픔들,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평등을 안고 나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직감한 것들
영화가 시작되고 8분이 지났을 때 나는 직감했다.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실존 인물은 미셸의 다큐멘터리 조각들과 함께 시작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한 여성의 결핍과 성장, 그리고 마침내 이뤄낸 성취가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사실 그대로도 아름다운 역사는 자연스러운 연출과 아름다운 영상미, 선한 의도가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한 마음을 느끼게 했다.
지금처럼 많은 게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시기에 깊은 위안을 줄 수 있는 영화다. 여성으로서 한계를 부딪혀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출발선에 서기까지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지나야 만 했던 사람이라면, 불평등과 차별에 아픔을 겪어본 적 있는 이들이라면, 결승선을 바라보며 쉼 없이 달려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깊은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덧, 영화 중간중간 보이는 탁 트인 절경과 아름다운 영상미는 답답한 마음에 시원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작가, 출판인 가랑비메이커 (@garangbima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