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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Oct 31. 2020

휘어진 길

   



  한 소절 노랫가락 마냥 흘러나온 길이 있다. 멀리서 사람의 발걸음을 유혹하는 길이 있다. 한 구절 시 같은 길. 산에서 흘러나온 길은, 사람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산이 흘려낸 한 소절의 노랫가락은 그러나 멀리서 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가락이다. 길은 멀리 있는 들판에서도 보이고 자동차 타고 지나가면서도 볼 수 있다. 우리들 시선 멀리에 있는 휘어진 길. 낯선 이름의 동네 뒷산에 나 있는 길. 그런 길은 도처에 있다. 카뮈는 말했다. "위대한 세계란 인간이 없는 자연 -그리하여 이 세계는 나를 무화한다." 이 위대한 자연을 만나려면 먼저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을 만나야 한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졌다하더라도, 찬 겨울바람이 분다하더라도, 산이 내민 한 소절 노랫가락의 유혹. 휘어진 길에 홀려 걸어가 보자. 서두르지 말자. 걷기에서는 서두름이 의미없다. 서두름이 싫고 서두름이 두렵고 서두름이 지겨워서 우리는 걷기를 선택했다. 서두름. 그것은 달리는 것이다. 달리는 현대인에 대한 이 지겨운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이 달렸고 또 아주 많이 달려야 한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걷기가 필요하다. 휘어진 길로 들어간다. 울창한 수목들. 하얀 털실 모양의 구름이 있는 파란 하늘. 햇살. 그리고 나뭇잎 바람에 쓸리는 소리.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혼자가 되어야 한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들이 묵상하고 있는 자세로. 저마다의 호흡으로 저마다의 침묵의 깊이로, 저마다의 기도 형식으로 서 있다. 퇴색한 나뭇잎들 생기를 잃은 수목들. 푸석한 바윗돌. 길을 쓸고 가는 바람의 피부. 걷기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걷기의 철학이 필요하다. 생활 속에서 걷기의 시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너무나 어렵게 되어버렸다. 걷기에는 무엇보다. 길이 필요하다. 우리를 유혹하는 길이 필요하다. 그런 길은 아주 많다. 우리들 마음의 안부를 묻는 길은 아주 많다. 이런 길을 찾아야 한다. 가만히 발걸음 옮기면서 땅의 느낌을 만나야 한다. 걷기는 '여유'가 아니라 '사유'이다. 몸이 바깥에 반응하는 사유이다. 몸이 길 위에서 만나는 언어화되지 않은 사유이다. 햇살과 찬 공기에 얼굴은 팽팽하게 당겨졌고 몸에는 한기가 느껴진다. 걷는 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휘어진 길에서는 그냥 걷는 것이다. 발걸음이 노랫가락 한 소절이 되는 것이다. 몸의 철학, 휘어진 길 위에서의 무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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