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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Oct 31. 2020

피아노 소리



  겨울, 서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이 통째 뜯어졌다. 단칸방에 들어 있던 살림살이들이 이삿짐 차에 실렸다. 몇 해 동안 저 방에서는 시시때때로 피아노 소리가 났다. 피아노 교습을 시작한 아이의 피아노 소리가 아니라, 제법 수준급의 연주였다. 나는 그 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릴 때면 내가 듣고 있는 음악도 꺼버리고, 혹 청소를 하거나 책을 읽을 때에 그 방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귀 기울였다. 지난 여름엔 유달리 피아노 소리가 화려하고 명징하게 들려서 피아노 소리에 가장 가까운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귀 기울였다. 하지만 피아노 소리보다는 피아노 치는 이의 손가락이 머릿속에 돌아다녔다. 내 머릿속 피아노 치는 이의 손은 참으로 가난한 손이었다. 애인도 없고, 애완견도 없고, 커피전문점에서 따뜻한 커피 잔을 만져보지도 못한 손이었다. 혼자서 매일 밥 먹고, 휴일에는 TV 앞에서 리모컨이나 매만지는 손이었다. 한 주일 내내 일에 지쳐서 밥 해먹는 일도, 설거지 하는 일도, 빨래 하는 일도 힘든 가난하고 고된 손이었다. 그 손이 모처럼 힘을 내서, 자기가 자기에게 한 곡의 피아노곡을 연주해 주는 것이었다. 자기가 자기에게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내 머릿속 피아노 치는 이의 손가락은 에곤 실레의 손가락처럼 슬프고 우울하고 기형적인 손가락이었다. 사실 몇 해 동안 피아노 소리의 주인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결국 끝내 이사 가는 날까지 단칸방에 기거한 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단칸방의 이삿짐이 실려 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의 방에서 마지막으로 실려 나온 피아노를 봤다. 검고 흠집이 많은 중고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 또한 몹시 지쳐있었고, 조율이 필요한 피아노였다. 숱한 음악이 피아노 속에서 흘러나와 공기 속으로 흘러간 것을 상상하면 우리가 올려다보면 겨울 찬바람 불어 맑은 대기 속 파란 별들이 되었으리라 상상해 본다. 그 중고의 피아노는 또 어느 가난한 방에 아귀도 맞지 않게 자리 잡히고 가난한 손가락을 가진 이가 가끔씩 자기를 위해 연주해주기만 기다리겠지. 그런 피아노 소리가 있다. 이웃집에서 들리는 어눌하고 박자도 서툴고 귀에 거슬리는 피아노 소리가 있다. 하지만 깊이 한 번 들어주자. 누군가 이제 막 피아노 교습을 시작하고 만들어내는 서툰 솜씨라서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라 두들기듯 연주하더라도 깊이 한 번 들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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