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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Jan 16. 2021

시인의 고통

아름다움, 아름다움을 살 수 있는 동안에는. - 빈센트 밀레이 - 


 


   시인의 고통이란 한 편의 시를 위해, 한편 시에 맞아떨어지는 이미지를 찾아서 하루고 이틀 열흘 밤낮을 되뇌고 헛짚으면서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자판을 두들기고 메모를 하고 방안을 서성이고 안절부절못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술을 마시고 다시 지우기를 반복한다. 자기에게 영감을 주는 음악을 듣고 '거기에 닿기' 위해서, '거기에 닿아'도 닿은 느낌도 없는 그 '닿음'을 위해서 밤의 공기를 퍼내는 삽질처럼 건더기도 없고 부딪침도 없고 무게도 없는 허황된 미치광이 같은  삽질을 해대며 한 줄의 이미지를 찾아 밤을 지내는 게 시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시인의 고통이란 바로 그러한 고통을 날이 날마다, 달이 달마다 정신병자처럼 겪고 또 겪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백색 종이에 다가서지 못하는 공포감을 느끼는 시인, 한 줄도 적어 넣을 수 없는 백지를 맞닿뜨리고 밤을 텅 비우고 마는 시인의 창작의 괴로움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나는 시인이라 부른다. 그들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경계인이다. 세속도 탈속도 아닌 경계에 서서 휘청거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현실세계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온 몸으로 경험하고 목도하면서 사유하고 눈으로 들여다보면서 이 세상의 온갖 괴로움들을 언어로 승화시키고 껴안아 주려고 하는 자들이다. 위안하고 어루만지기 위해서 언어의 본래성, 인간의 원초성을 찾아, 언어의 본래성을 위해 뒤돌아가는 사람들, 오염되지 않고 훼손되지 않은 언어의 본래성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시인들이다.

  그런 시인들은 이 세상에서 탈속과 환속의 경계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 경계선상에 있는 그 자체가 커다란 고통의 생이다. 그들에게 세속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물적 잣대들로 시인들의 눈높이를 그들의 걸음걸이를 그들의 생뚱맞은 말놀이들을 오해하고 난도질하고 재단하는 세상이여.  

 불모의 다락방에서 밤을 새워 시를 쓰는 시인이 그대들 이웃에 있다면, 그의 다락방 문 앞에 물 한 잔과 장미 한 송이를 선물하기를. 물 한 잔은 시인이 갈증에 갈증을 느끼는 언어의 시원이며, 장미 한 송이를 시인의 피부와도 바꾸고 싶은 한 줄 이미지를 상징한다.  세상이여, 시인들의 고통을 안다면 물 한 잔과 장미 한 송이라도 선물하기를. 그러하면 시인들은 손가락이 붓도록 글을 쓰고 안색이 헐해지고 허리가 휘어버린 몸으로  눈이 움푹한 육체에서 탄생시킨 백 송이 같은 언어를, 언어의 정수를 그들에게 선물할 것이다. 이 세상에 내어놓은 수많은 아름다운 시인들의 언어는 그렇게 태어났음을. 그러한 고통의 과정은 세상이 잠들고 술에 취하고 춤을 추는 쾌락의 정원에서 놀 때, 불모의 다락방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시인의 고통을 안다면, 시인이 자기를 시를 헌시할 때는, 온 온주와 전생과 후생에까지 닿을 수 있는 언어이다. 시인의 언어를 헌시받은 세상이여. 지금이라도 물 한 잔과 장미 한 송이라도 불모의 다락방에 선물하기를.

 혼례의 옷을 입은 채 숲으로 날아나 이슬 맞은 잠을 자는 테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결혼의 집에서 달아나 그녀가 홀몸으로 잠자리 날개 같은 혼례의 옷을 입은 채 숲에서 이슬 맞은 잠을 잘 때 그 지친 영혼의 잠을, 바닥 없는 잠을, 우두망찰 숲 속의 사슴이 내려다보듯, 맑은 영혼의 두 눈의 사슴의 눈도 얼마나 아프겠는가. 시인의 눈도 고통을 승화하고 바닥 없는 존재의 미약한 잠을 들여다보면서 시인은 그 존재들의 떨리는 생을 자기 안으로 껴안으면서, 바닥 없이 잠을 자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더불어 함께 아파해준다는 것을, 그것이 시인의 고통이다. 그 고통은 한 존재의 고통이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들이 바닥 없는 잠을 자는 힘없고 나약한 여인들의 잠. 그 척박한 잠을 함께 고통한다는 것이다. 세상이여, 시인의 시들은 그렇게 읽혀야 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읽힘으로써 세상의 고통에 조금 더 가까이 가게 되고 가까이 가게 되면 시인들이 백송이 장미를 어떻게 피우고 언어의 정수를 어떻게 길어 올리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노동이다. 돈벌이가 되지 않는, 그러나 인간적이면서 신적인 노동. 그것의 결과물이 실재계에 닿지 못하는, 한계성에 여전히 머무는 시인의 시이다. 시인의 언어에 끝내 빈틈을 내고 결빙의 언어를, 바늘 끝으로 쪼개 빈틈을 내고 , 그들의 사소한 모순의 행위들을 도덕적 잣대로 후려치고 윤리성이 근본주의로 몰아갈 때, 세상의 시인들은 언어를 포기를 시대를 대신해 아파하던 언어적 희생도 포기한다는 것을. 세상이여, 그들이 시를 포기하면, 세상이여 너희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힘없고 살점 없는 아내가 밤을 지새 공부하고 글을 쓰고 문장을 해독하고 지친 아침에, 지아비란 작자가 몸뚱이가 탐이나 강제하고 억지 섹스를 강요하고 아프게 할 때, 문학에 몸을 희생한 여인의 몸은 얼마나 많이 산산조각 났겠는가. 이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 살점 한 점 없는 여인의 몸피 같은 시인의 언어도 그렇게 산산조각 나게 아프고 아픈 게 시이다. 시는 그런 것이다. 산산조각 나게 아픈 언어. 

 그러하더라도 여전히 시인들은 산산조각날 수 밖에 없는 언어를 감내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언어의 장벽,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빈 틈을 알고 허덕이기만 할 것이다. 마치 만 미터 심해를 바라본 고래의 충혈된 눈처럼, 세상의 바깥에까지 닿는 언어. 존재를 넘어서고 또 넘어서면서 여전히 현재성을 사랑하고픈 언어를 찾아 헤매는, 경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세상이여, 그들에 물 한과 장미 한 송이를..

 저기, 아름다움이 살 수 있는 동안에는

 저기, 아름다움을 위해, 퇴락하고 시들어 죽어가고 낡아가는 것들을 위해 시인의 고통이 닿는다는 것을.

 거기 닿는 것은 그것의 찬란한 고귀성과 위대함 그러면서 미약하고 한계성에 닿아 있는 것을 알아채는 시인. 시인들은 그래서 몸이 산산나도록 밤을 지새는 여인의 야근처럼 아프고 아프다. 세상이여

 시인의 문 앞에 물 한 잔과 장미 한 송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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