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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Jul 11. 2021

사실과 환상

Quint Buchholz , 1957

퀸트 부흐홀츠 :  독일 출생.일러스트, 극사실주의, 초현실주의 화가. 

새들에게도 창이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도 전망을 주어야 한다. 날개를 위로 하기 위해 나의 전망을 먼 풀밭에 내어준다.


어린 왕자가 귀환하려나. 나에게 지팡이와 사막이 있다면, 난 하룻밤에 어린 왕자가 사는 거처를 찾을 수 있다.

나의 초승달을 누군가에게 준 적이 있다.


달을 바라보는 돌을 만났다. 달을 환하게 바라보는 돌. 밤의 산책길에서 만난 돌은, 오래전에 마당 밖으로 여행을 보냈던 돌이었다. 돌이 달의 산책을 하고 있었다. 

소년이 바다를 만나면 커다랗게 성장한다. 세계를 커다랗게 만나는 것이 성장이다. 

트럼펫을 배우려 했다.  대지를 꽁꽁 얼어붙게 하는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다. 심경에 이야기를 눈송이로 만들어 음악. 그러나 내가 찾는 음악은 시야 너머에 가득했다. 트럼펫을 묻어야겠다.

책을 물어다 주는 거북이와 흐린 태양을 읽는 독서. 햇살을 읽는 법을 아직 못 배웠다. 책장을 들출 때마다 세계의 불확실성을 알게 된다. 햇살과는 무관한 것인가?

너를 읽으려고 편지를 쓰는 것이다. 


맨 처음 시인이 되고자 했는 날

" 나는 가슴 한쪽을 뜯어냈다. 더는 상하지 말라고, 던져버렸다. " 

 아주 오래전에 내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쓴 시. 

 

내 이웃엔 불화나 평화 고통이나 괴로움 초월이나 서정을 다루는 음악가도 시인도 소설가도 명상가도 없다.

언젠가 달팽이에 대한 시를 쓸 것이다.  지구를 한 바퀴를 굴리는 달팽이의 지난한 걸음걸이.


모두가 나의 밖, 멀 먼 먼 먼 이웃들이다. 그들 여행의 끝에 내 집의 뜰에 와서 깊은 낮잠을 자는 상상. 


언젠가 보았다. 지상에 발 디디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증발을. 

책에 대해 논하지 말라. 그냥 읽는 것이다. 모든 책은 한 권의 책이고, 한 권의 여러 권의 분량으로 해석된다.

내게 안겨 위로받는 책이 있다.


그래, 그 안에 너의 꿈이 한가득, 만화경 같이 펼쳐질 거야.


나는 무너져 내리는 하늘을 정말 한 번 보고 싶다. 

나의 집 담장 위로 누군가 내게 시적 암시를 남긴다. 체리 음료와 촛불인가! 

불안과 결핍에 휩싸여 자기를 감금하고 사는 이들에게

체리 음료와 촛불을!

낭떠러지 위에 지붕 없는 집을 짓고 살다가 새가 되는 생의 종착지.

낡고 오래된 창. 달빛에 씻긴 창. 창을 사이에 두고 나와 바깥은 얼마나 많은 갈등을 했던가. 그럴 때

달은 저의 온후함을 나의 발치에 내려준다. 황금빛 밀밭으로, 따뜻한 봄의 언어로, 그리고 몇 개의 시편으로,

그러나 어떤 이에게 달은 밧줄에 꿰어 끌어내리고 싶기도 하다. 아니, 달의 결박을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그는 지쳤다. 일등 하는 것도, 사냥하는 것도, 육식도, 이빨을 드러내는 것도, 그늘을 찾아 은둔하는 것도 싫어졌다. 밀가루 음식을 잔뜩 먹고 널브러져 태산 같은 잠을 자는 것. 태산 같은 잠의 회복력

밤과 정원, 창의 불빛과 지붕에 고양이.  분명한 사실인 환상.

책으로의 여행 이거나 추락을 위한 비상.

나를 환상극으로 데려가는 날갯짓의 책. 

나는 안다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지쳐 잠을 자는 사람을. 그의 잠을 책이 덮어주는 것까지.

별과 달이 있음을 모르고 벽의 틈새로 별과 달을 찾는 감금

같은 책이라도 바다에서 읽는 것과 내륙에서 읽는 것이 다르다. 하물며 골방에 처박혀 있는 독서와 몸에 날개를 달고 읽는 독서의 차원은 다르다. 그렇다고 골방에 처박혀 읽은 책은 내게 몽상의 깊이를 날개를 달고 읽은 책은 내게 투명한 시적 근원을 제공한다. 모두가 필요하다. 

따뜻한 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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