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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Sep 17. 2019

비트겐슈타인의 오두막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5남 3여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오스트리아의 철강 회사로 엄청난 부자였다. 그의 집에는 많은 화가 음악가들이 드나 들었다. 브람스 슈만, 말러 쇤베르크 클림트… 그의 형제들도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첫째 형은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었고 둘째 형은 첼로를 네 째 형은 피아노를 연주했다.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하지만 어느 집이든 왕가든 좋은 일에 마가 깐다 했던가. 그의 형제들은 대체로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첫째 형은 아버지와 불화 때문에 자살 했다. 둘째 형도 군에서 자살을 했다. 셋째 형은 음악을 들으면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평생을 자살충동과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청소년기에 비트겐슈타인은 공학을 공부했다. 그는 다닌 린츠국립실업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히틀러도 당시에 같은 학교에 다녔다. 둘 사이에 교류가 있었는지 알수 없지만, 히틀러의 기록에 의하면 학교에 이상한 유대인이 한 명 있었다는 라고 했다.비트겐슈타인은 이후 맨체스터 공과 대학에서 항공공학을 공부했다. 이 시절에 러셀의 '수학원리'를 읽고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으로 러셀을 만나러 갔고 여기서 러셀에게서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화 중 아주 유명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러셀의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한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때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러셀은 이런 비트겐슈타인을 두고 천재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했다. 일 년 후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의 바닷가 오두막집으로 사라졌다.



 그는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이 오두막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기록하고 생각하고 생각을 수정하고 또 기록하고 자살충동에 시달리고 생각하고 기록하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일차대전이 일어났다. 그는 오스트리아 군에 자원 입대 했다. 포대관측병으로 최전방에 나갔다. 그는 전장에서도 기록을 했다. 포탄이 날고 총성이 들리는 가운데서도 생각이 떠오르면 노트에 기록을 남겼다. 이탈리아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은 멈추지 않았고, 여기서 그의 첫번 재 명저 <논리철학논고>가 집필 된다. 수용소에서 얼마든지 지인들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가 장교로서 함께 했던 부하들을 두고 나올수 없다하여 수감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비트겐슈타인은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넘겨 받았지만 그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재산을 분배하고 예술가를 후원했다. 정작 자신은 방 한 칸과 몇 개의 가구가 전재산이었다.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이 구절은 '논리철학논고'의 첫 구절이다.

논리철학논고는 발간 하자 마자 단번에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통해 모든 철학적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해결 했다고 선언하고, 자신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면서 스스로 좀더 쓸모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이 구절은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 때 시골로 내려가 수학선생이 된 그의 나이가 서른 한 살이었다.


https://youtu.be/aqt_zZ2bNa0 

그는 시골학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철학에 수정을 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논리철학논고'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다시 캠브리지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자 경제학자 케인즈가 마중을 나왔는데. 케인즈는 자기 부인에게  “신이 돌아왔소” 라고 전했다고 한다. 그만큼 논리철학논고의 반향은 당대에 비트겐슈타인을 신의 반열에 올려놓은 철학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때까지 학위가 없었다. 석사, 박사 어느 학위도 없었고, 러셀과 무어가 그의 논리철학논고를 박사 논문으로 받아 들이고 심사해주었다. 심사가 끝난 후 비트겐슈타인은 그들에게 “내 논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나는 어차피 당신들이 이해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어요.” 


다시 이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는 다시 전장에 나갔다. 병원의 조수 역할을 했다. 두 번의 전쟁을 참전한 철학자는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노르웨이의 오두막집에 칩거 했다. 그는 다시 돌아온 오두막 집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일랜드의 오두막집과 노르웨이의 오두막집을 오가며 생각하고 정리한 책은 ‘철학적 탐구’ 였다.


『논고』와 『탐구』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른바  그림이론으로 알려진 『논고』의 언어관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는 이름과 대상간의 지시 관계, 명제와 사태간의 대응에 입각한 단일한 논리를 통하여 작동한다. 『탐구』의 핵심적인 생각은 우리의 언어를 관통하고 있는 이러한 단일한 본질, 혹은 논리에 대한 거부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코넬 대학에 초청 되어 갔을 때 일화는 그의 평전에 전해 진다. 


모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맬컴이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팔에는 윈드 재킷과 낡은 군복 바지를 입은 갸냘픈 노인이 기대어 있었다. 만일 지성으로 빛나는 얼굴이 아니었더라면, 사람들은 그를 맬컴이 추위를 피하게 해주려고 데려온 거리의 부랑자 쯤으로 간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개스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야.”

개스는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지 ‘농담하지 말라’는 식의 말을 했다.이때 블랙이 일어서서 그 야윈 노인에게 말을 했다. 

“비트겐슈타인 교수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블랙이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말하자마자 그 자리에 모인 학생들이 숨을 크게 멈추는 소리가 났다.

 당신은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1949년 철학 세계에선, 특히 코넬에선 신비스럽고 두려운 이름이었다. 

그 숨이 멎는 소리는 블랙이 “플라톤,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라고 말했을 경우에 생겼을 것과 같은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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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비트겐슈타인은 전립선 암 판정을 받는다. 그의 나이 62세. 의사는 살수 있는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말했고,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아주 좋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기전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람들한테 내 삶이 아주 멋 있었노라 전해 주세요” Tell them I’ve had a Wonderful Life



비트겐슈타인의 생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보면서 그의 오두막에서의 은둔 생활에 감정이입을 해본다. 악전고투의 집필. 자살충동, 죽음에 대한 공포.  집필하며 불안해 하며 살았던 한 인간 철학자를. 그가 전쟁터로 달려갔던 이유는 아마 죽음 공포를 정면으로 마주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두 번의 전쟁을 통해 완성된 세계에 대한 해석, 논리철학논고, 철학적탐구는 이해의 측면이 아니라, 한 인간의 생애의 측면을 살피는 것으로도 읽어보아야 할 철학책이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의 오두막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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