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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에 국대가 되다

Day 14 in Vancouver

by 정원에

따님은 그저께밤 자정이 다 되어서 돌아왔다. 조카네 집에서 호박죽을 끓이고 오느라. 난생처음 해보는 단호박죽. 아니, 죽을 직접 끓인 게 미음 끓인 다음으로 두 번째일 거다. 열여덟 따님은 피곤해 보였지만 깊은 미소가 예쁘게 피어올랐다. 지난주 역시 난생처음 가본 교회. 그것도 캐네디언 교회. 그 교회에서 만난 한국계 캐네디언, 원래 캐네디언들과 금세 친해진 따님. 더듬거리는 영어로도 그렇게 유쾌하게 수다를 떠는 걸 보니 새삼 낯설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때 영어덜트young adult(청년부)에 속한 아드님 친구들, 언니들을 통해 오늘 쑤웁 데이soup day가 진행된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그리고 점심에 각국의 수프를 나눠 먹은 뒤 40분 정도 떨어진 스피니시 뱅크 비치로 해수욕을 떠난다는 소식까지.


한인 마트에서 단호박을 같이 샀다. 1개가 흔한 단호박 3개 정도크기였는데, 그걸 3개를 샀다. 그리고 내가 다른 장을 보러 간 사이. 그 자그마한 손으로 단호박 껍질을 벗기느라 한참 고생을 한 모양이다. 0죽에서 파는 호박죽을 사 먹을 때 한 번은 그랬단다. 호박만 들어가고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호박죽이 뭐 이렇게 비싸누 하고.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아니 손가락 저리게 느꼈단다. 게다가 삶고 믹서기에 으깨고 계속 서서 저으면서 끓이고. 팥을 불리고 삶고. 식혀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잠만보 따님은 어제 아침 6시가 조금 넘어서 벌떡 일어났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교회는 9시 반에만 출발해도 넉넉한 데 말이다. 어느 때보다도 재바르게 준비를 맞췄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준비를 가장 빠르게 한 날이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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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데이가 끝나고 떠날 영어덜트 비치 모임용 수영복도 챙기고. 썬블럭도 듬뿍 바르고. 한 듯 안 한 듯하다며 캐네디언 언니들이 부러워했다는 K 화장술도 발휘하면서까지. 그렇게 준비해 간 단호박죽. 내가 다른 분들이랑 이야기를 잠깐 나누는 이십여분 사이 단팥 고명까지 올리는 센스를 발휘는 따님표 단호박죽이 다 사라졌단다. 즈마야 오빠도, 쉐리나 언니도 못 먹었다고 따님이 더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샤라 언니는 먹었다고, 환상적인 맛이었다며 양 손 엄지척을 해줬다고 흥분되어 있었다. 열여덟에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된 따님은 어느 날보다도 훨씬 더 한국을, 부모를, 자신을 사랑하는 날이 되었단다. 특히 다른 나라 수프와 나란히 올려놓고 들고 가면서 묻는 이들한테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떤 성분이 들어가 있는지를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설명을 할 때 진땀께나 흘린 눈치지만.


하지만 시종일관 너무 즐거워 보였다. 수프 데이를 마치고 영어덜트부가 비치로 출발하기 전. 한국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스물셋 샤라 언니와 눈빛으로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이 더욱 여유로워 보였다. 마치 먼지 펄펄 날리는 운동장이 자기 고향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물고기처럼. 지난주 처음 만난 샤라 언니가 떡볶이를 좋아한다고 한국에서 챙겨 왔던 떡볶이 소스를 아낌없이(?) 나눠 넣어 어젯밤 호박죽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었었다. 조리하는 순서를 적은 메모지와 함께. 건네 받은 샤라가 오 마이 갓을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괴성처럼 지르면서 몸으로 기뻐했다. 이 따님 저 따님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니 세상의 모든 걱정이 다 사라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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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에서 더욱 냉정한 현실 남매 오빠도 엄지척을 했단다. 아드님의 엄지척은 엄청난 호들갑이다. 그렇게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리액션에 반응에 인색한 아버지를 스스로 닮아 버린 아드님이기 때문에. 여기와서 3년 동안 조금씩 알아가고 있단다. 진심어린 리액션은 그 포인트가 오히려 자신에게 차곡 차곡 저장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포인트가 자신을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교회 마당에서 삼삼오오 차에 나눠 타고 비치로 향하는 영어덜트들 머리 위로 따듯한 햇살이 마음껏 부딪혀 흩어졌다.


어제 그곳에서는 인종, 성별, 나이, 언어에 관계없이 함께 살아간다는 엄연한 사실, 나눌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 무한한 위로와 격려가 넘쳐 났다. 사람이 왜 숨을 쉬어야 하는지를 그냥 가만히 서 있어도 느끼게 해 주는 장면이었다. 비록 그들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지만 바다랭귀지와 눈빛, 몇 개의 단어 그리고 햇살 같은 미소면 충분했다. 그들도 나도 열여덟에 국대가 된 따님도 그리고 그 연결고리의 중심에 서 있는 아드님도. 이제 아드님이 어제 그곳을 떠나 홀로 자신의 새로운 연결 고리를 찾아야 하는 날이 일주일 여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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