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2 in Vancouver
내가 처음 달리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딱 이맘때였다. 여전히 더운데 벌써 입추야 했었다. 더위를 잘 타지 않아서 그랬지 싶다. 한여름 에어컨 밑에서 맥이 빠진 나는 그냥 뜨거운 태양아래로 나섰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터덜터덜 그렇게 걷듯 달렸다. 첫날의 심장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냄새까지도. 워치도 채워있지 않았다. 어플도 깔려 있지 않았다. 왼손에 휴대폰을 들고 달렸다. 손바닥이 미끄러져 오른손으로 다시 왼손으로 여러 번 옮겨야 했다. 잡고 있던 손바닥의 땀을 닦아내야 했기에. 그렇게 2시간을 넘게 달렸다. 나중에 나만의 동네 코스를 만들면서 보니까 첫날 그렇게 달린 길이는 20km가 조금 못되었다.
그렇게 동네 달리기는 시작되었다. 몇 년간 당연히 달리기는 몸에 착 달라붙는 공기처럼 편안했다. 동네 러너가 된 지 10개월.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 사이트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공식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동네 러너에 맞게 10km 구간을. 5227. 그덕에 나에게는 또 하나의 비밀 번호가 생겨났다. 그런데 출퇴근을 하고, 주말에 이런저런 일과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들 사이사이에서 동네를 달리는 건 의외로 쉽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식사 후 달리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한두 번이 아니라 길게 보면 결코 좋은 습관이 되질 않는다. 그렇다고 안 먹거나 혼자 먹기는 더욱 그렇고.
그러다 보면 현실적으로 타협하는 방법이 트레드밀이다.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달리기를 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잃지 않을 수는 도구. 그래서 트레드밀은 효율성이다. 몇 년 전에는 트레드밀을 대여해서 한참을 집안에서 달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트레드밀은 숙제같이 여겨졌다. 해야만 하지만 하기 싫은. 트레밀 대여가 오히려 동네 달리기를 갈구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머리가 아파도 상쾌해도, 무거워도 가벼워도, 이열치열로 땀 흘리고 싶으면 뛰쳐나간다. 무엇보다 실제 나가는 것만큼 나가기 전에 달리기 할 때만 입는 반바지, 양말, 신발을 신을 때부터 기분이 리프레시된다. 벌써 달리기 시작한 거다, 마음은.
지금도 트레드밀보다는 동네를 달린다. 그러다 보니 우리 동네에는 내가 정해 놓은 거리별 코스가 있다. 왼쪽 손목에 워치하나만 차면, 아내가 사준 블루투스 이어폰에 띡 하는 연결음만 들리면 마구마구 달릴 수 있다, 는 마음은 먼저 달려 나간다. 물론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그 코스를 선택하고 속도를 조절한다. 이제는 결코 죽을 둥 살 둥 달리지는 않는다. 10km 구간 공식 기록 52분 27초. 나의 가장 빠른 달리기로 남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는 1년을 넘게 고생하고 있는 요통, 최근에 찾아온 족저근막염이 모두 준비 안된 달리기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아드님의 이런저런 업무 처리와 이사 때문에 3주간 머무르고 있으면서 거의 매일 빠트리지 않고 했던 운동이 달리기보다는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이었던 이유다. 가져온 물건에 요가 매트를 가장 먼저 챙긴 이유였다. 지금의 목표는 분명하다. 계속 달리는 거다. 그러기 위해 지금 내 몸이 뿜어내는 염증을 줄이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2주 정도 아드님이 다니는 헬스장에서 한 시간 남짓 근력 운동을 한 후 지난주 금요일부터 이 동네를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나와 언덕을 올라 아드님이 졸업한 고등학교를 지나쳐 다시 내려가는 언덕길. 그 끝에 있는 초등학교 옆 잔디공원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되돌아오는 코스. 7km가 조금 넘는다.
트레드밀의 유혹은 지금도 느낀다. 주중에 적어도 1-2회는 양보할 수밖에 없어진다. 현실적으로. 하지만 트레드밀은 동네 산책로를, 자전거길을, 도로를, 골목을 달리는 것에 비해 덜 자극적이다. 아주 엄격하게 기계적이다. 컨디션에 따라 생기는 여백이 허락되지 않는다. 스스로. 트레드밀을 내려와 동네를 달린다. 그래야 바람이 나를 깨운다. 몸에 달라붙은 옷과 피부 사이로 파고들며 시원하게 간지럽힌다. 지나치는 러너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귀로 들어오는 비트에 맞춰 심장이 요동치고 뜨겁게 붉은 짭조름한 냄새를 피워낸다.
보기만 해도 새콤한 귤이 한 바구니가득 있다. 트레드밀은 그 한 바구니 속의 귤을 모두 한꺼번에 껍질을 까놓은 것 같다. 건조하다. 말라 있다. 그 귤을 먹고 싶을 때 천천히 하나씩 촉감을 느끼면서 파바박 터지는 과즙을 보면서 향긋한 냄새를 맡으면서 까먹는 것, 그게 동네 달리기이다. 그때야 비로소 새콤달콤한 귤의 제 맛이 느껴진다. 그렇게 이 동네의 진짜 모습이 내가 다가온다. 아드님을 둘러싼 하늘과 바람이 우리 동네로 멀리 멀리 이어질 거다. 숲과 울타리, 도로와 신호등, 버스정류장이 나를 기억할거다. 내가 기억하는 이 동네는 그렇게 나의 기억속에 여러 장의 사진으로 향긋하게 남아 있을 거다. 다 동네를 달렸기 때문에 가능한 기억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