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7 in Vancouver
그렇게 어제, 오늘 앉아서 맞았다. 그런데 인중도 인중인데 손등에 깊게 꽂힌 침이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아프다. 나는 혈관을 찾기가 어렵지 않아 손등에 주사를 맞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밴쿠버에 있는 한의원에서. 한의사는 중국에서 침술을 전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의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용하기로 소문이 나 있단다. 열댓 개의 침을 놓고 불을 끄고 나가면 한 삼십 분 넘게 앉아서 잔다. 그제, 어제는 그렇게 폭 떨어졌다. 원래 낮잠을 자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달달하게 잘 잤다.
그런데 오늘은 잠이 오질 않았다. 그 덕에 옆 방에서 한의사와 어느 환자분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렸다. 옛날 옛날에 하면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동화책, 아니 살아온 이야기. 삼십여 분 이어진 이야기는 짧은 책 한 권이지 싶었다. 84세의 할머니. 아마 팔, 어깨가 불편해서 자주 오는 단골 환자인 듯했다. 그런데 연세에 비해 건강이 관리가 잘 되었다고 한의사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할머니는 침이 아니라 다른 기구에 의한 치료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 연세에 비해서 관리를 아주 잘하셨어요, 짱짱하게 걸어 다니시고, 의식이 또렷하고, 말씀도 잘 듣고 잘하시고, 아주 아주 건강하세요, 어떻게 관리를 하셨어요
>에구, 내가 건강하다고, 비결? 비결은 일을 많이 한 거야. 여기 처음 와서는 어디 어디서 십 년 넘게 농사를 지었어. 버섯 농사.
>>아, 버섯 농사요? 무슨 버섯이요?
> 송이버섯, 그거 있잖아. 하얀 송이. 그걸 십 년 조금 넘게 했어요, 그때 우리 아들은 공부를 했고. 그러다 다른 사람한테 빌려 주고 다른 일을 했지. 그 사람한테 빌려 준 거 세 받아서 세금 내고. 아, 그런데 여긴 아주 달라. 그렇게 세를 받은 건 내 소득이 아니라고 세금을 엄청 매겨. 그래서 아들한테 그랬어. 이거 세금 때문에 살기 어렵다고.
>>이제는 아드님한테 다 물어보고 사시면 되잖아요? 회계사 아드님한테?
한의사는 할머니 아들도 아는 듯했다. 그러면서 한의사는 할머니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기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동안 들어준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들처럼, 아니 손자처럼 자기 이야기 좀 들어달라고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할머니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 어떠세요? (에이, 싫어. 난 여기가 좋아) 아, 그렇지요. 열몇 시간 비행기 타는 것도 힘드시고. (이천 사 년인가 우리 아버지가 한번 오셨었어. 엄마는 비행기 힘들다고 안 오시고. 그렇게 오셨다 가시고 그 이듬해에 돌아가셨어. 그런데 거길 가보지 못했어. 그때 하필 #$7&=$47여서).
이 부분은 영어로 대화를 나눠서 잘 못 알아 들었다. 아마 도큐먼트(서류)가 뭔가 잘못되어서 출국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에고. 그 마음이 어떠셨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저는 한국에 가고 싶어요. 애들만 공부 끝나면 한국에 가서 살고 싶어요. (한국이 좋아? 요즘 한국 먹고살기가 더 힘든 데 뭐가 좋아? 공기도 좋지 않고). 요즘 한국이 살기 힘들어요? 한적한 곳에 가서 살면 좋아요.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요. 저는요 5남매 중 넷째인데 우리 집 유일한 아들이죠. 누나들이 여기 사는데 아들 얻으려고 낳다고 네 번째에야 저를 낳았어요. 아들 하나 더 낳으려고 하나 더 낳았는데 또 딸이었죠.
북태평양 동쪽 해안에 위치한 밴쿠버는 서쪽은 바다에 접해 있다. 중심지에서 한 시간 정도만 벗어나면 동남북쪽으로는 넓디넓은 농장이고, 호수고, 강이고, 산이다. 할머니는 그 넓디넓은 농장 중 한 곳으로 이민을 왔단다. 거기서 젊음 시절 내내 농사를 지으며 자식을 공부시켰나 보다. 그렇게 성장한 아들이 이곳에서 회계사 일로 자리를 잡은 듯. 참 다행이다. 원래의 동네를 떠나 이 먼 곳까지 찾아와 낯선 동네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몸과 마음이 고생스러웠을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만은 않다.
이민移民. immigration. 타국에 1년 이상 머무는 행위 또는 그 타국에 정착 터를 잡고 살아가는 행위. to pass into a place as a new inhabitant or resident, " especially "to move to a country where one is not a native, for the purpose of settling permanently there. 말과 문화가 익숙한 곳에서도 다른 동네로 옮겨 적응하는 게 쉽지 만은 않다. 열흘 전 십 년 넘게 살던 동네를 떠나 우리 동네로 이사 온 40년 지기 친구. 신경 쓰고 옮기고 바꾸고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듯했다. 하물며 타국에서 정착 터를 잡고 살아가는 행위는 결코 쉽지 않은 움직임이다.
그 이유가 개인사에 따라 이러저러 다양한 게 있을 거다. 하지만 공통점은 지루한 천국과 재미있는 지옥 사이의 그 어느쯤에서 자신, 자신과 연결된 이들의 삶을 결정해야 하는 어려움일 거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해야 했어야(하여야) 하는 이유는 어찌 보면 아주 단순했을 지도. 그런 의미에서 부모는 이 동네 저 동네의 삶을 정리할 때쯤 자식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단 하나 있다면 무엇일까? 어느 계좌에 돈이 얼마나 있고, 비번은 뭐고, 어디에 가면 산과 들과 호수가 다 내 꺼라는 거? 이럴 때 이렇게 생각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행동하라고 당부하는 거? 아마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거 하나이지 싶다.
얘들아, 꼭 엄마(아빠)처럼 살아라. 그렇게 행복하게, 맛나게 살다 우리 재미있는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