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Day 17 in Vancouver

by 정원에

오늘로 사흘째다. 밴쿠버 한의원에서 침을 맞은 게. 침은 대략 열몇 개를 맞는다. 그런데 허리 통증을 잡기 위해 인중, 손등, 팔, 다리에 맞는다. 허리 근처에는 놓지 않고. 그리고 첫날은 누워서 맞았다. 그런데 어제는 50대 중후반쯤 보이는 한의사가 앉아서 맞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배드 오른쪽에 사장님, 아니 회장님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짙은 갈색 가죽이 헤어진 걸 보니 꽤 연륜이 묻어나 보이는. 심한 경우에야 누워서 맞지만 앉아서 맞아야 효과가 더 좋다고 한다.


그렇게 어제, 오늘 앉아서 맞았다. 그런데 인중도 인중인데 손등에 깊게 꽂힌 침이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아프다. 나는 혈관을 찾기가 어렵지 않아 손등에 주사를 맞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밴쿠버에 있는 한의원에서. 한의사는 중국에서 침술을 전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의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용하기로 소문이 나 있단다. 열댓 개의 침을 놓고 불을 끄고 나가면 한 삼십 분 넘게 앉아서 잔다. 그제, 어제는 그렇게 폭 떨어졌다. 원래 낮잠을 자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달달하게 잘 잤다.


그런데 오늘은 잠이 오질 않았다. 그 덕에 옆 방에서 한의사와 어느 환자분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렸다. 옛날 옛날에 하면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동화책, 아니 살아온 이야기. 삼십여 분 이어진 이야기는 짧은 책 한 권이지 싶었다. 84세의 할머니. 아마 팔, 어깨가 불편해서 자주 오는 단골 환자인 듯했다. 그런데 연세에 비해 건강이 관리가 잘 되었다고 한의사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할머니는 침이 아니라 다른 기구에 의한 치료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 연세에 비해서 관리를 아주 잘하셨어요, 짱짱하게 걸어 다니시고, 의식이 또렷하고, 말씀도 잘 듣고 잘하시고, 아주 아주 건강하세요, 어떻게 관리를 하셨어요

>에구, 내가 건강하다고, 비결? 비결은 일을 많이 한 거야. 여기 처음 와서는 어디 어디서 십 년 넘게 농사를 지었어. 버섯 농사.

>>아, 버섯 농사요? 무슨 버섯이요?

> 송이버섯, 그거 있잖아. 하얀 송이. 그걸 십 년 조금 넘게 했어요, 그때 우리 아들은 공부를 했고. 그러다 다른 사람한테 빌려 주고 다른 일을 했지. 그 사람한테 빌려 준 거 세 받아서 세금 내고. 아, 그런데 여긴 아주 달라. 그렇게 세를 받은 건 내 소득이 아니라고 세금을 엄청 매겨. 그래서 아들한테 그랬어. 이거 세금 때문에 살기 어렵다고.

>>이제는 아드님한테 다 물어보고 사시면 되잖아요? 회계사 아드님한테?


한의사는 할머니 아들도 아는 듯했다. 그러면서 한의사는 할머니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기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동안 들어준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들처럼, 아니 손자처럼 자기 이야기 좀 들어달라고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할머니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 어떠세요? (에이, 싫어. 난 여기가 좋아) 아, 그렇지요. 열몇 시간 비행기 타는 것도 힘드시고. (이천 사 년인가 우리 아버지가 한번 오셨었어. 엄마는 비행기 힘들다고 안 오시고. 그렇게 오셨다 가시고 그 이듬해에 돌아가셨어. 그런데 거길 가보지 못했어. 그때 하필 #$7&=$47여서).


이 부분은 영어로 대화를 나눠서 잘 못 알아 들었다. 아마 도큐먼트(서류)가 뭔가 잘못되어서 출국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에고. 그 마음이 어떠셨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저는 한국에 가고 싶어요. 애들만 공부 끝나면 한국에 가서 살고 싶어요. (한국이 좋아? 요즘 한국 먹고살기가 더 힘든 데 뭐가 좋아? 공기도 좋지 않고). 요즘 한국이 살기 힘들어요? 한적한 곳에 가서 살면 좋아요.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요. 저는요 5남매 중 넷째인데 우리 집 유일한 아들이죠. 누나들이 여기 사는데 아들 얻으려고 낳다고 네 번째에야 저를 낳았어요. 아들 하나 더 낳으려고 하나 더 낳았는데 또 딸이었죠.


북태평양 동쪽 해안에 위치한 밴쿠버는 서쪽은 바다에 접해 있다. 중심지에서 한 시간 정도만 벗어나면 동남북쪽으로는 넓디넓은 농장이고, 호수고, 강이고, 산이다. 할머니는 그 넓디넓은 농장 중 한 곳으로 이민을 왔단다. 거기서 젊음 시절 내내 농사를 지으며 자식을 공부시켰나 보다. 그렇게 성장한 아들이 이곳에서 회계사 일로 자리를 잡은 듯. 참 다행이다. 원래의 동네를 떠나 이 먼 곳까지 찾아와 낯선 동네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몸과 마음이 고생스러웠을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만은 않다.


이민移民. immigration. 타국에 1년 이상 머무는 행위 또는 그 타국에 정착 터를 잡고 살아가는 행위. to pass into a place as a new inhabitant or resident, " especially "to move to a country where one is not a native, for the purpose of settling permanently there. 말과 문화가 익숙한 곳에서도 다른 동네로 옮겨 적응하는 게 쉽지 만은 않다. 열흘 전 십 년 넘게 살던 동네를 떠나 우리 동네로 이사 온 40년 지기 친구. 신경 쓰고 옮기고 바꾸고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듯했다. 하물며 타국에서 정착 터를 잡고 살아가는 행위는 결코 쉽지 않은 움직임이다.


그 이유가 개인사에 따라 이러저러 다양한 게 있을 거다. 하지만 공통점은 지루한 천국과 재미있는 지옥 사이의 그 어느쯤에서 자신, 자신과 연결된 이들의 삶을 결정해야 하는 어려움일 거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해야 했어야(하여야) 하는 이유는 어찌 보면 아주 단순했을 지도. 그런 의미에서 부모는 이 동네 저 동네의 삶을 정리할 때쯤 자식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단 하나 있다면 무엇일까? 어느 계좌에 돈이 얼마나 있고, 비번은 뭐고, 어디에 가면 산과 들과 호수가 다 내 꺼라는 거? 이럴 때 이렇게 생각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행동하라고 당부하는 거? 아마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거 하나이지 싶다.


얘들아, 꼭 엄마(아빠)처럼 살아라. 그렇게 행복하게, 맛나게 살다 우리 재미있는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같은 듯 다른 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