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에게 드리는 글

[짙은 새벽이 나에게 거는 속삭임] 1

by 정원에

나에게 달린다는 건 천하 쉽다. 운동화 하나만 있으면 된다. 지금 바로 나가 두어 시간은 달릴 수 있다. 심장조차 느끼지 못하면서. 그냥 바로. 이를 위해 습관적으로 평소에 뒤꿈치 들어 올리기만 한다. 날아갈 듯 가벼워도, 울적해져도 그냥 나가면 달릴 수 있다. 그런데 나의 글은 그렇지 못하다. 글감이 불현듯 떠올랐다고 단어가 문장이 바로 되지는 않는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그 마음이 담긴 행들이 이어지는 게 지독히 어렵다.


쓴다는 것은 경제성, 효율성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물론 때로는 15분 정도 달렸을 때처럼, 빈 속에 소주 두 잔을 연거푸 집어넣었을 때처럼 훅하고 달아 올라 뭔가가 마구 써지는 때가 있긴 있다. 하퍼 리처럼 평생 이 한 글만 쓸 것처럼. 생각으로 써지는 글이 손가락을 통해 하얀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검게, 짙게, 가득 쓰인다. 그러나 거의 언제나 그건 그녀의 이야기, 로 끝이 난다.


지금도 어떤 음절로 시작해야 할지 벌써 20분 가까이 커서만 앞뒤로 왔다 갔다 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물거린다. 흰 화면을 가득 채운 건 단어가 글이 되고 스스로 흡족한 작품이 되기 이전에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몸이고, 마음이고, 정신이다. 그것들을 관통하는 농축된 시간이 짙게 녹아들어 간 숭고한 나의 분신. 나 밖에서 나를 보는, 나 안에서 나를 보는, 제2, 제3의 나 자체라는 생각.


마치 영화관에 걸린 결과물이 아니라 메이킹 필름 같은 것. 비공개 감독판이 바로 지금 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경제적, 효율성 같은 수식어가 천박해질 뿐인 그런 위대함. 바퀴는 언제나 바퀴축에서 고정되어 회전을 한다. 하지만 바퀴가 닿는 지면은 운전자의 핸들에 의해 결정된다. 가시밭길이어도, 자갈길 이어도. 푹푹 빠지는 모래여도, 차가운 얼음 위여도, 녹아내리는 아스팔트 여도. 내달려야 한다. 선택은 운전자의 몫이니까.


살다 보면 갑작스러운 멈춤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변의 속도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기. 그렇게 달리기. 그러다 걷기. 그렇게 천천히 멈추기. 차는 달릴 때보다 달리려고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 운전자가 사라진 그때. 결과적으로 보이는 건 너덜너덜해진 바퀴다. 그렇게 달려와 가지런히 벗어 놓은 운동화처럼.


맞다. 살아내다 행복해서, 힘들어서 요동치는 터질 듯 한 심장을 단박에 멈추는 건 아주 위험하다. 자기만의 결승선이었더라도. 달려온 힘으로 가슴이 밀어내 끊어진 테이프를 지나쳐서 한참을 걷듯이 뛰어야 한다. 벌컥거리는 심장이 안정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어야 한다. 결승선이라는 것 자체가 내가, 우리가 만들어 준, 만들어 놓은 것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짜에 불과하니까.


그 테이프가 보이지 않을 때부터 믿고 있고, 괜찮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연습. 그게 동네 러너가 국제 마라톤 대회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시작일 거다. 내가 하퍼 리가 꿈에라도 될지 모른다는 착각의 시작일 거다. 그렇게 연습하고 착각 속에 살다 그것으로 끝날지라도. 허벅지에 새겨진 기다란 40여 년 전 상처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네가 달린다고, 달리기를 한다고? 너 다리로? 정말? 그건 기적 아냐? 기적?


허벅지에 길게 새겨진 흉터보다 열두 살 마음의 상처가 더 깊었던 어린 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한 게 2018년 한 여름 어느 날이었다. 비 맞은 듯 흘러내리는 땀에 숨어든 눈물이 얼얼한 뺨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던 감각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때의 그 뜨거움은 올여름 더위보다 앞으로 더 더워질 여름보다 분명 더 크고 강한 열감이었다.


마구 써지 건, 몇 날 며칠 동안 써 모았 건, 그래서 모든 글은 위대하다. 그 자체만으로. 자기만의 열감이고 기적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너덜너덜 해진 바퀴에 불이 붙을 것처럼 갑자기 급정거하듯, 터질듯한 심장을 몇 초 안에 단박에 멈추듯 화면 가득한 글이, 내가 휘리릭 순간 사라지는 몹쓸 경험은 뭐라 표현할 방법이 아직은 없다. 그런 경험은 할 때마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전히.


그래도 계속 쓴다. 너덜너덜 해져도. 그냥 쓴다. 막 쓴다. 돈 준다고 밥 준다고 써야 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그냥 쓰고 싶은 걸 쓰는 자유. 막 떠오르는 데로 쓰는 여유. 아무도 쓰라지 않았지만 그냥 내가 쓰는 인간이 되겠다는 이유. 그 자유와 여유, 이유를 잃지 않는 품격이 매일매일 넘쳐나는 내가, 우리가 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면서. 우리, 쓸 수 있을 때까지 같이 써요. 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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