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명작] 1_나의 아저씨
살아간다는 건 모두 각자의 스토리가 서로 이어지고 연결되는 과정의 총합이다. 내가 타인의 스토리에서는 언제나 조연이고 엑스트라 일 테니까. 그래서 내 삶의 스토리는 꼭 나만의 스토리가 아닐 수 있는 거다. 동네를 가볍게 산책하듯 나와 연결된 타인의 스토리에 귀를 기울여 봐야 하는 이유다. 행도 불행도 홀로 만들고 지울 수는 없는 거니까.
그 스토리 산책을 아내의 제안으로 <나의 아저씨>에서부터 시작한다. 픽션을 본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아내와 후계동을 찾아 헤매게 만든 동명이인 김작가의 작품이다.
"그럴 거면, 친구랑 살아. 왜 나랑 살아. 왜?"
어릴 적 참 많이 들었던 말이다. 드라마에서, 골목에서, 집에서도. 40여 년 전, 유독 남자 어른들은 친구(동성 친구, 이성 친구)를 찾아 길거리, 집 밖을 늘 헤매었다. 우리 집 남자 어른도, 그 남자 어른의 남자 형제들도, 우리 윗집 남자 어른도. 그런데 5년 전, 후계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 하루도 잘 버틴, 아니 잘 버텼다고 생각한 남자 어른들은 집으로 퇴근하지 않는다. 여자 친구인 정희네 가게로 모인다. 진짜 출근이라고 매일 흥분하면서.
그곳에만 들어서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내 안에서 못 받는 위로를, 집 안에서 꺼내지 못하는 말들을, 밖에서는 잘 몰라주는 아픔을 친구들은 서로 안아주니까. 그렇게 우리만의 아지트가 있으니까. 그런데 퇴근할 맛이 나는, 그런 남자 어른들과 같이 사는 여자 어른들은 그럼? 친구가 싫었을까. 없었을까. 아저씨 나빠요, 아줌마 불쌍해요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 심리의 우선 상태, 마음을 어디에 먼저 쓰는지 자기 순위를 매기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설정이 나이 많은 남자 어른(동훈)와 어린 여자 아이(지안)일까. 그건 극명한 세대 간 대비에서 비춰지는 다양한 선택에 대한 우선순위를 나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먼저, 남자 어른과 여자 어른은 어떻게든 살아낼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래야 둘이서 만들어 놓은 환경에 책임을 지고,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으니까. 돈이 있고, 건강이 있어야 하니까. 안 짤려야 사니까.
반면 동훈이와 지안이는 서로 어떻게 살면 안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마음 급한 이들을 위한 B급 사랑이야기, 막 나가고 잘 나가는 아침 드라마류의 대화가 아니다. 둘이 주고받는 말속에 잘못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 기나긴 시간을 채우면서 살아 낼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는 거다. 그러면서 동상이몽이지만 내 말을 '들어는' 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거다.
25년 넘게 10대들과 지내고 있다. 그러다 보면 내가 동훈이가 되어(미안합니다. 흥분하지 마세요. 인간 동훈이 아니라 동훈이의 역할을 이야기하려는...) 수많은 지안이 들을 만나야 했다. 그리고 남자 어른이지만, 내 삶도 정리가 되어 가지 않는 상황에서 어린 지안이 들의 지금과 나중의 삶에 희망을, 기회를, 여유를 심어주어야 했다. 그냥 정해진 답을 가르치기만 하는 건 물리적으로나 힘들지 거뜬히 해낼 만했다. 가르친다는 건 다 그런 거다. 항상 양극성의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인간들은 다 뒤에서 욕해. 친하다고 욕 안 하는 줄 알아? 인간이 그렇게 한 겹이야? 나도 뒤에서 남 욕해. 욕하면 욕하는 거지 뭐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일러. 쪽팔리게
#아버진 뭐 하시고? 아저씨 아버지는 뭐 하세요? 나는 아저씨 아버지가 뭐 하시는지 하나도 안 궁금한데, 왜 우리 아버지가 궁금할까? 그런 걸 왜 물어봐요? 잘 사는 집구석인지 못 사는 집구석인지, 아버지 직업으로 간 보려고? 실례예요. 그런 질문.
#스스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네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야
지나고 나서 보니, 동훈이와 지안이가 대신 좀 더 세련되게 말할 뿐, 현실에서 먹고 사느라, 수많은 지안이에게 남자 어른 흉내를 내느라, 수없이 조언하고 지적하고 타이르면서 내가 내뱉었던 말들이다. 퇴근하고 후계동 정희네는 없었지만, 새벽 베란다에서 못 먹는 술을 홀짝인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그 베란다에서 이렇게 새벽 글쓰기를 하게 된 나다.
#누가 욕하는 거 들으면, 그 사람한테 말하지 마. 너희들 사이에서는 그게 우정일지 몰라도, 어른들은 안 그래. 괜히 말해주고 그러면 그 사람이 널 피해. 내가 상처받은 걸 아는 사람. 불편해. 보기 싫어.
많은 지안이 들이 같은 어른이 되어 아는 체를 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할 테다. 얼마 전 받았던, 13년 만의 메일도 그중 한 지안이의 것이었다. 지안이는 지안일 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가려 한다. 인간이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저지르는 실수를 답습하고 있는 거다. 묻지 않는다. 타이밍 적절하게 확인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냥, 자기 인생의 갤러리 속 한 장면을 알아서 정리하는 거다. 그랬을 거라고.
다시 여자 어른. 여자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동훈이와 친구들, 은희네 가게, 그리고 지안이. 22년 동안 함께 하고 있는 우리집 여자 어른이 한참 남매 육아로 힘들어할 때 내가 전성기(?)였다. 수많은 지안이 들을 잡으러 다니고, 데려 오고, 설득하고. 그러다 지쳐 집에 오면 냅다 쓰러지기 일쑤였다. 지껏 지 한몸 충전하고는 다시 혼자의 허기를 달래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조언을 구하고, 멋진 동훈이 역할로 충전하느라.
#이 동네도 망가진 것 같고, 사람들도 다 망가진 것 같은데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아요. 절대로.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 줘서.
퇴근했는데 바로바로 집에 안 들어온다, 친구들과 만나 주 5일 술잔을 기울인다, 어린 사람들, 우리와는 처지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위로한답시고 혼자만 위로받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들어준답시고 자기 이야기만 해댄다. 지긋지긋한 이곳에서 벗어나 번듯하고, 반듯한 동네로 이사 가고 싶은 마음만 벌써 수십 년 째라면. 함께 사는 여자 어른의 눈으로만 볼 때는 죄다 정상이 아닐꺼다.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상황일꺼다.
엄격한 직급의 질서가 가득한 공간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넘어 오게 되면 흔히 듣게 되는 호칭이 아저씨, 아줌마이다. 그 말속에는 약간 얕잡아 보는, 깔보는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는 게 사실이라, 아저씨, 아줌마 스스로도 부정했던 한 때 다 있었지 싶다. 그런데 원래 아저씨는 아버지 친형제를 제외한 친척의 남자 어른들을, 아줌마는 부모와 같은 항렬의 여자 어른들을 부르던 경어였다.
사회 변화 속도에 아저씨, 아줌마가 맞춰가지 못하면서 나타나는 버그가 고착화된 모양새다. 그래도 아저씨, 아줌마가 세상을 바꾸고, 만들어 왔다. 지금껏. 그러니 더 당당한 (남자, 여자) 어른으로 살아내야 할꺼다. 그 모습을 보고 어른이 되는 수많은 지안이들은 그 자체가 행운일테니까. 세상 수많은 인간 관계에서 나의 (어른스런) 아저씨, 우리 (멋진) 아줌마가 더 넘쳐 나면, 밖에서 배회하는 동훈이는 줄어 들고, 아저씨, 아줌마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어른이 되는 지안이가 늘어나지 않을까.
응, 그래, 나 아저씨야.
오, 반갑구나, 난 아줌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