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食] 1
어서들 와라. 수고했다. 춥지, 추워.
으흐, 이제 본격적으로 추워지는데요?
뭘 이렇게 많이 하셨어요?
그냥. 별 거 없어. 아까 전화받고 요 앞에 나가봤지.
무가 너무 좋더라구. 그래서 커다란 거 세 개를 샀어.
가을무는 인삼보다 좋으니까. 보약이니까.
이렇게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가을무는 금방 바람 드니까.
이렇게 조려 먹고, 부쳐 먹고, 담가 먹고 하는 거지.
이래 놓으면 잇몸으로도 먹을 수 있으니까.
1. 정여사표 무조림은 일단 크다. 눈으로 봐도 시원시원하다. 통통한 무 정 가운데 부분이다. 이런 크기가 찜기 안에 대여섯 개가 있다. 허리 숙여 쪼그려 앉아 한참을 골랐을 가을무다. 찬 바람에. 흥정에. 속이 단단하게 묵직한 무 세 개를 봉지에 축 늘어지게 담아 들고 걸어오는 동안 봉지 끝이 걸린 오른손가락 끝부분에 발가스름하게 피가 몰렸을 거다.
2. 무를 반으로 자르지 않는다. 그냥 가운데 토막으로 뭉텅 하게. 그렇게 속 깊은 냄비 위에 차곡차곡 올려 얼기설기 탑을 쌓는 다. 무가 서로 포개지지 않게, 서로를 방해하지 않게, 난 놈이 든 놈을 내려 누르지 않게. 그렇게.
3. 물이 맨 아래 깔린 무를 충분히 잠기게 할 정도로 돌려 넣는다. 그리고 간장 세 스푼, 고춧가루 다섯 스푼, 설탕 한 스푼 반, 다진 마늘, 생강을 넣어 양념장을 만들어 부어 준다. 맨 위에 올라앉은 무부터,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흘러 들어가게. 뷔페에 있는 초코 분수처럼.
4. 송송썬 대파 가득, 속 깊은 바닥 주변에 들기름 주르륵, 국물 내는 멸치와 건새우 소복이. 그러고 센 불에 10분 남짓 우르르 끓여낸다. 끓는 동안 밥상을 차린다. 하나씩 하나씩 밥공기, 국그룻, 숟가락, 젓가락을 일정한 간격으로 상위에 올리면서, 누구 거 누구 거 하시다, 엄마도 엄마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5. 이제 약한 불로 줄이고 국물이 자박자박 해질 때까지 끓여 낸다. 오늘 같이 모이는 우리 식구들 숫자만큼 국물 양을 조절한다. 많이 오면 넉넉하게 적게 오면 더 자박하게. 으, 아, 춥다. 추워. 오, 요건 무슨 냄새지? 뭐죠? 매콤하게 달달한 따듯한 냄새가 온 집안 한 가득이다.
김이 모락거리는 잡곡밥 위에 한 숟가락 폭 떠서 올린다. 무조림 크기보다 작지 않게 밥을 떠야 한다. 작으면 단맛이 줄어드니까. 입속 구석구석으로 숨겨진 행복이 터지듯 즙즙이 넘쳐난다. 말캉거리는 무조림은 심심하다. 정여사표 무조림은 매콤한 데 맵지 않다. 입속에 나 있는 혓바늘도 무반응일 정도다.
그건 밥이 아니라 영혼의 마사지다. 입속, 목구멍, 식도, 위장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통로를 지나 나를 살리는. 행복하게 스며드는 무즙 속에 노곤한 눈물을 뒤섞여 뱃속으로 씹어 넘겨 버리면, 다시 일어날 기운이 쑤욱 올라온다. 정여사가 무즙 속에 그득하게 숨겨둔, 말캉거리는 행복이 세상의 온갖 염증을 다 녹여줄 태세다.
가을무. 조. 림이 나를 올려다보며 그런다.
아, 쉬염쉬염 해.
과식하지 말고, 과속하지 말고~~~~
#김여사정여사그리고김작까#나의 S(소울) F(푸드) 시리즈 1탄#가을무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