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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가가 되는 첫날

[나명작] 7 .. 이미지(더중앙)

by 정원에

오늘. 12월 31일. 지구인 모두에게는 언제나 한해의 마지막 날, 새해가 시작되기 전날이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1994년 키리바시 공화국 시민들에게는. 키리바시는 인구 12만 명, 1인당 국민소득 1750달러, 부산광역시보다 조금 큰 국토 면적. 선교사들이 성경을 번역할 때 현지어에 산이라는 단어가 없어 힘들어했을 정도로 낮은 지형 때문에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직격탄을 맞고 있는 섬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평소에는 관심을 별로 두지 않던 선진국 사람들이 오늘만 되면 모여들어 전국에 있는 4개의 오성급 호텔 객실이 외국인들로 가득해진답니다. 우리가 새해 해맞이를 하러 동해안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1994년 가진 나라들의 이익에 부합되게 국제 날짜변경선이 수정되었습니다. 그 적용을 처음 받은 나라가 바로 (거의) 아무도 몰랐던 존재의 섬나라, 키리바시 공화국이었습니다. 덕분에(?) 그 나라 시민들에게는 1994년 12월 31일은 사라졌습니다. 12월 30일 다음날 바로 1월 1일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혹시, 수인선 협궤열차를 기억하시나요? 대학생이 되고 나서 친구들과 가끔 놀러 가는 길목에 있었던 아담한 열차. 마주 앉으면 서로의 무릎이 닿을 정도의 좁은 기차였지요. 일제강점기 때 쌀과 소금 수탈을 위해 건설된 일제의 잔재였지만, 지역 주민들에게는 소중한 교통수단이 되었던. 그 협궤열차가 마지막 운행을 했던 날도 바로 12월 31일, 오늘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대를 하고 복학할 무렵, 그 소식을 접하면서 혼자 쓸쓸했던 가슴의 느낌이 나 홀로 되살아나는 날도 바로 오늘입니다. 지금은 그 협궤 위를 더 크고 편리해진 복선 광역 철도가 다시 달리고 있습니다.


또, 오늘 12월 31일은 지금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일으켜 지속하고 있는 푸틴이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을 내려 앉히고 러시아 연방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스물다섯 번의 12월 31일을 맞이하고 있네요. 공교롭게도 오늘은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날이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건 이익에 오염되기 쉬운 인간의 건방진 이성을 일상에서 겸손하게 길들이는 과정 속에서 인간의 덕성이 쌓여 간다는 파스칼의 조언이 내년에는 하루빨리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에게 먹혀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신비아파트가 처음 방송을 시작하고, 야후 코리아가 우리나라에서 버티지를 못하고 철수하고, 태조 왕건 하면 떠오르는 김영철 배우의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라는 대사가 새로운 2천 년이 시작되기 전날인 오늘에 방영되었고, 대한늬우스가 마지막으로 방송되었고, 촛불시위로 파면되었던 대통령이 특별사면돼 출소된 날도 오늘입니다. 그다음 해 오늘에는 피선거권이 18세로 낮추어져 다시 그다음 해에 만난 우리 반 아이들 중 여리와 벼리는 생애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고 꽤나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오늘 하면 잊지 말아야 할 우리 모두의 공통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에게 어쩌면 '지우고 싶은' 3년의 시작을 소리없이. 가십처럼 알렸던, 그날이 바로 4년 전 12월 31일이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스물일곱 명의 원인 불명 '폐렴' 환자가 발생했다고 중국 당국이 발표한 날. 그래서 처음에는 언론에서 '우한 폐렴'이라고 불렀던. 처음에는 동선을 파악하고, 피해 다니면서 걸리면 다 죽는다라고 했던 한계가 없던 무한 공포를 느껴야만 했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다시 오늘이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걷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이라는 것을 느낀 지도 벌써 몇 개월. 혹시, 나 스스로가 그 행복을 또 잊으려고 애쓰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다시, 불행과 비참, 허무에서 도피하기 위해 잡다한 것에 빠지려고만 하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오늘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라는 게 원래 있는 대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인식하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더듬어 봐야 할 오늘입니다.


마지막 날 생각해 봅니다. 오늘까지 늙어갈 것인가, 내일부터 성장할 것인가. 언제나 마지막 날은 첫날의 전날입니다. 새로운 성장을 할지, 오늘보다 하루, 한해 더 늙어만 갈지는 또다시 내가 선택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 소복이 쌓여 온 세상을 리셋하듯 하는 눈이 알려줍니다. 한 순간에 그 세상을 원래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가랑비만 봐도 명확해지는 게 오늘, 12월 31일입니다.


내 인생의 가장 훌륭한 명작, 나를 위해서라도 내일부터 니체의 '아가'가 되어야겠습니다. 아가는 자기 자신을 무한 긍정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갖고 놀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을 하루하루 새롭게 빚어냅니다. 아가에게 어제와 꼭 같은 오늘은 있을 수 없습니다. 꼭 같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초인입니다. 그래서 아가는 초인과 같습니다. 초인은 진정으로 강합니다. 삶의 모든 것을 즐기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서로 새해 복 많이 짓고, 나누시면서 다시, 함께 아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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