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명작] 이미지(google play)
열여덟 따님 추천으로 애니메이션을 오랜만에 봤다. 영화 <엘리멘탈>. 그렇게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서 읽히는 키워드는 꽤 많았다. 그 키워드들을 관통하는 건 바로 OST 'Steal the show'. 이 영화는 OST 제목이 다 했다. 영화 내내 우리에게 너무 흔해빠져 시시할 지 모르는 '네 삶의 주인공은 너'라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을 알려주려 한다. 실천하는 '순서'를 제안하면서.
맞다. OST 가사를 엮어내는 잔잔한 비트는 적극적인 권유다. 해봐, 괜찮아, 도전해 보라고 한다. 권유의 표현 속에는 '안 해보면 손해일 거야, 지나고 나서 후회할 텐데'라는 뉘앙스가 넘쳐난다. 영화 내내 표면적으로는 불같은 성격의 불과 물 같은 물의 사랑이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불과 물이 서로 사랑에 빠지면서 '당신에게 반했어. 우리가 되자'라고 해도 될까 한다. 이 부분이 열여덟 따님에게 와닿았지 싶다.
그 장면에서 우리가 그랬던, 사랑에 빠져 물불 안 가리던 그때가 스물 거리며 화면 위에 오버랩된다. 내가 가지지 못한 본질적인elemetal 매력에 끌렸던. OST가 이어주는 장면 속 대사들을 보면 '자, 계속 투쟁해'하는 메시지는 끊임없이 읽힌다. 이 부분이 영화 막바지에서 따님을 눈물짓게 했지 싶다.
사랑이 일상에서의 잡다한 가치들에 대한 투쟁을 은근슬쩍 강력하게 등 떠민다. 젊은 불의 부모님이 낯선 도시에 처음 들어설 때, 웰컴 to 엘리멘탈 시티,라는 대사로 시작된다. 불은 '부모님의 큰 희생에 보답하는 길은 나를 희생하는 거니까'라고 다짐하며 성장한다. 물을 만나 사랑에 빠진 덕분에, 비비스테리아를 발견한 덕분에, '어떤 상황에서도 필' 자신이 되어보라는 내 안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갈등한다. 본질적인 자기 투쟁의 시작이다.
영화는 본질적인 삶의 가치 투쟁에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불이 가진 재능이다. 영화에서는 강화유리를 뚝딱 만들어 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모든 자식은, 우리가 그랬듯이 부모를 떠난다. 몸과 마음이. 며칠 전 다시 일상으로 날아간 서른 하나 조카처럼 떠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스스로가 재능을 발견하는 과정, 도전하는 과정, 부모가 지지하는 과정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거다.
원자화된 현대인은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국가가 커지고, 다국적 기업(엘리멘탈 역시 다국적 기업의 생산품이다)의 엄청난 영향으로 쪼그라들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학교 교육은 감성과 가치관을 되살려내는 걸 두려워하는 시스템적 오류를 지니고 있다. 가정에서는 투쟁보다는 경쟁에서 이겨내는 길, 순서를 답습하는 데 갈수록 더 급급해진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는 웰컴 투 00 시티 해야만 하는, 떠나야만 하는 자식들은 재능의 발견은 고사하고 볼 일도 '아무 데서나' 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마치 설렘이 가득하지만 언제나 깨지기 쉬운 택배 상자 같다. 그 자식의 부모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쪼그라든 마음은 세상 변화를 위한 크고 작은 시도를 자꾸 포기하게 만든다. 지금의 자식 세대보다는 낫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경험 없는 유대감은 직장에서는 물론 좋아서 선택한 커뮤니티에서 마저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 정도면 괜찮게 잘 살고 있는 거야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이성을 도구로 활용하는 시대의 주인공으로 살아낸다. 언제부터인가는 내가 불인 지, 물인지도 모른 채. 그러는 동안 정치의 자유가 쪼그라들고, 공공 영역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내가 선출하지 않은 세력이 책임감도 없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장면을 그저 가십거리 구경하듯 댓글을 달면서 현실 정치에 참여한다고 착각한다.
한인 2세라고 알려진 감독은 이 메시지를 던지려고 한 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라도 늦지 않았다고. 다시, 자신만의 재능을 발견하려고 시도해 보라고. 비비스테리아를 당장 찾지는 못하더라고 그 길을 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불이 떠나면서 (떠나게 해 준) 부모에게 올리는 큰 절이 나에게, 관객에게, 우리에게 지금이야, 하고 권유하는 인사로 보인 이유다.
그리고 그 이유는 랑시에르의 당부처럼 지금 이 시대에는 하나, 둘의 위대한 작가가 필요한 게 아니라 누구나 '나도 작가'라고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키워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들리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큰 절을 올리고 세상밖으로 나갔다 돌고 돌아 다시 부모 곁에서 이제야 내 생각을, 가치를 그리고 내 삶을 되짚어 보려고 끄적이는 나를 내가 기쁘게 느끼는 이유다.
아내는 자주 그런다. 우리 따님이 (결혼을 해서, 짝을 만나서, 재능을 찾아서, 하고 싶은 게 생겨서) 집을 떠날 때가 되면 가장 눈물을 펑펑 흘릴게 나라고. 눈물이 많은 아내와 그녀를 닮은 따님보다 내가 더 그럴 거라고. 그런데 이 말에 부인을 하지는 못한다. 그럴 거 같다. 왜. 언제 저렇게 커서 재능을 찾아(찾으려고) 제 살길 찾아 떠나나 하는 벅찬 기쁨에서 말이다.
잘 가르치는 스승은 많이 가르치지 않는다. 질문을 잘 던진다. 당연히 진정한 배움은 엄청난 지식을 알게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미 궁금하면 묻지 않고 찾는다. 하지만 자신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 건 인공 지능이 알려주지 못한다. 내 안에 힘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 해방이고 해방은 스스로 해야 한다. 해방되지 못한 자들이 쓰는 게 흉기를 휘두르는 따위의 물리적인 폭력이다. 단답형으로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맞설 본질적인 투쟁은 자기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한줄/자꾸 자기에게 묻고 답하는 과정, 그 과정을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