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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아니다

[나명작] 10

by 정원에

어제, 도장을 하나 새겼습니다. 그 도장을 주머니에 넣고 오랜 친구와 눈 내리는 골목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아담한 술집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업무적으로 사인이 가능한 경우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도장은 유효합니다. 공식적이건 저의 마음속에서건. 사회생활을 공식적으로 처음 시작한다는 것을 냉정하게 증명해 준 것들 - 명함, 크레이트 카드, 각종 번호가 부여된 신분증 그리고 도장 -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그 네모와 동그라미 안에는 분명 '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익숙한 내가 있지요. 하지만 때로는 내가 맞나 싶은 나도 들어차 있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일과 중의 모습과 퇴근 후의 모습, 업무중일 때의 나와 놀 때의 나가 연결되지 않을 때가 있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강제로 나를 그 네모와 동그라미 안으로 밀어 넣어 연결시켜 주는 것들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합니다.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낮에 각자 통화한 고향 친구 A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기업과 개인의 납세 관련 업무를 이십여 년 넘게 담당해 온 친구입니다. 그런데 요즘 개인 사무실 개업을 앞두고 조직에서 징계를 받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는가 봅니다. 나와 친구한테 따로 전화를 걸어 하소연과 넋두리, 한탄이 뒤섞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도, 친구도 A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만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적인 일탈의 문제가 아니라 '실적 저조'가 징계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A 친구의 이야기로는. 그런데 또 다른 친구들의 걱정 섞인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합니다. A가 상관의 지시를 고분고분하게 잘 따르지 않는, 관계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무엇을 지시하고 왜 따르지 않았는지는 잘 몰라 무어라 이야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의 이야기를 모아 듣다 보니 드는 생각은 분명했습니다.


어릴 적 남매들은 여느 아이들처럼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만들어 노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둘이 노는 것을 보면 아드님은 정성껏 모래성을 쌓습니다. 그러는 동안 따님은 깊은 터널을 팝니다. 옆으로 옆으로. 따님이 파놓은 그 터널 끝에 또 다른 모래성을 하나 더 쌓습니다. 그러는 동안 파도는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면서 터널을 적십니다. 모래성 아랫부분을 슬슬 쓸어내립니다.


그러면 남매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엉덩이를 바다 쪽으로 향하고 상체를 완전히 모래성 쪽으로 숙인 상태로 팔꿈치부터 손바닥까지 팔 전체를 사용해서 모래를 더 열심히 쓸어 담아 쌓기를 반복합니다. 사과 반쪽 같은 엉덩이로 동해 바다 파도를 전부 다 막으면서 거대한 모래성을 쌓아 올릴 기세로 말이지요. 하지만 어김없이 모래성은 다시 무너져서 온 세상이 리셋되듯 깨끗해지기를 반복합니다.


터널이 잠기고, 모래성이 사라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남매들은 오히려 와하면서 박수를 칩니다. 서로를 쳐다보면서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렇게 뜨거운 햇살아래서 벌겋게 온몸이 달아 올라올 때까지. 이제 그만, 하고 싶은 마음도 어느 순간 잊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때 남매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나약하고, 비겁하고, 실망에 절어 포기하려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스물 하나, 열여덟이 된 남매의 지금에서 내가 돌이켜 보면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가득했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수단과 목적이 일치했던 것이지요. 바로 놀이말입니다. 그 남매들이 커서 둘 다 20대, 30대가 되어도 모래성까지는 아니더라고 무한 반복하는 파도와 밀고 당기는 것에 잠깐이라도 박장대소할 수 있는 것도 그 놀이의 추억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너지는 모래성을 보면서 의미 없다, 의미 없다를 자동 연사로 중얼거릴 겁니다. 부서졌었다는 아픈 과거에 대한 기억만 가득하다면 더욱 사람에 따라서는 갑갑함과 자책, 모멸감까지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수단과 목적이 언제나 분리된 노동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시쳇말로 제대로 놀 줄 몰라서, 놀아 본 적 없이 노동만 했다면 더욱 그럴겁니다. 모래성은 자멸의 상징처럼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노동의 현장에서 '나'를 증명하는 것들이 앞에서 이야기한 다양한 형태의 신분증, 도장 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들은 특정하게 부여된 업무를 통해 나를 증명하라는 지시에 대한 약속 다짐을 의미합니다. 그 특정 업무를 내가 아닌 당신을 위해 완수하겠다는 약속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 과정에서 내가 사라지는 자괴감을 느끼게 됩니다. 네모와 동그란 도장 안에 갇힌 직장인이라면 거의 누구나 경험해 보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네모와 동그라미 안에 있는 나는 처음부터 올곧은 내가 아니었지 싶습니다.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만 하면서 돈까지 받는 꿈같은 직장 생활은 사실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그런 약속을 했었으니까요. 혹시 25년 넘게 근무하고 있는 이 세 번째 직장이 사실, 나와 가장 잘 안 어울리는 곳이었다는 것을 다시 25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불현듯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분명한 건 친구도, 나도, A도 언젠가는 끝내고 각자 남을 거란 겁니다. 결국 그전에 작고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해 봐야지 싶습니다. 계속되는 시도와 시도 사이에 긴 터널이 만들어지면 그 공간에 언제나 공기로 충만한 일상처럼 각자의 삶도 충만해지리라는 기대를 가져야지 싶습니다. 그런 시도가 계속 이어진다는 건 남매들이 환호성을 질렀던 모래성 그 자체입니다.


바로 그런 기대를 갖고 살아내는 일상에서의 자기 충족적 예언말입니다. 지금 A와 친구, 나에게는 모래성을 쌓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는 시도를 다시 시작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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