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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꾸준하게 모으는 태도

[고3의 기술] 11

by 정원에

새벽 내내 배관을 경쾌하게 두드리며 흐르던 빗소리에 온 동네가 어슴프레 깊게 잠들어 있던 6시 무렵. 열여덟 따님과 함께 낯선 세상으로 출발했습니다. 날이 뜨거워지기 전 마스크를 하고 한참을 같이 달렸습니다. 운전하는 옆에서 내내 디제이를 해 줍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비슷한 옷, 비슷한 음식, 비슷한 장소,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에게 이끌리듯 음악도 그렇습니다.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 비트보다는 가사, 도전보다는 위로를 해주는 것 같은 노래에 더 쉽게 귀가 가 닿습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 같은 노랫말이 시구처럼 들리는 노래가 말이죠. 하지만 세상을 아직 많이 접하지 못한 10대는 오히려 음악으로 거침없이 이런 저런 세상과 만나는 것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따라 하지 못해도 좋죠. 나 대신 외쳐 주면 좋죠. 내 삶이 아니어도 좋죠. 가사보다는 리드미컬한 비트가 우선입니다.


그날도 차에 올라 타자 마자 '아빠, 블루투스' 하더군요. 그리고는 (이미 담아 놓은 리스트에 있는) 노래들을 연속에서 들려줍니다. 자동차 위아래, 앞 뒤에서 가득히 흘러나오는 음악은 자그마한 콘서트홀 부럽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정해 둔 틀 밖에서 혼자 공부한 따님이 난생처음 도전하는 IELTS 시험에 부담된다면서 먹는 야채죽을 조금 나눠 먹은 게 다여서 그랬는지 더 헛헛했던 뱃속으로 심장이 떨어졌다 올라오기를 반복했습니다.


마치 나란히 달리는 차들이 우리 둘과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내 고막의 바운스에 맞춰 앞뒤로 왔다 갔다 군무를 치는 것 같더군요. 일명 열여덟 따님표 '전투력 상승' 플레이 리스트라고 하면서 눈에 힘을 주더군요.


세상에 맞서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데, 단지 필요한 건 단 하나뿐. "'내가 나를 믿고 밀고 나가보는' 것뿐이야! 그냥 소리 질러, 마구 몸을 흔들어, 단 하나뿐인 너를, 너의 심장을 쓰다듬어. 매일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달려 나가, 멈추지 마. 그게 다야, 그게 전부야. 걱정은 방구석에 쑤셔 넣어 두고 나와, 달려!"라고 외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첫 번째 곡은 Maverick. 영화 <탑건>의 주제곡. 해변가에서 비치 발리볼을 할 때, 하늘 위로 전투기가 날아 지나가던 그 장면, 그때 흘렀던 노래죠.


'원했다면 롸잇 나우! 기쁨 주는 날!'.


아재 아빠는 두세 번 반복하는 가사 속에서 결국 찾아냈습니다. 분명 그렇게 들렸습니다. 한번 찾아들어 보세요. 분명히 그렇게 들립니다. '원했다면 기쁨 주는 날~ 나잇, 나잇, 나~잇.' 원래는 'I ain't worried 'bout it right now, Keeping dream alive'입니다. '난 지금 당장 걱정 따윈 안 해. 내 꿈은 아직 살아있으니까'.


한번 그렇게 들리기 시작하면, 그렇다고 믿기 시작하면, 그렇게 믿고 살아온 시간의 누적만큼 쉽게 바뀌지 않지요. 그래서 처음부터 잘 듣고, 잘 만나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콧노래처럼 허밍으로 흥얼거리면서 핸들 위 손가락이 깃털같이 하늘거립니다. 따님의 양손을 쫙 펴고 세상 가장 멋진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세상을 날아다닙니다. 역시 노래는 가사입니다



새로운 시작은 늘 설레게 하지.

모든 걸 이겨낼 것처럼.

시간을 뒤쫓는 시곗바늘처럼 앞질러 가고 싶어 하지.

그어 놓은 선을 넘어

저마다 삶을 향해

그 선을 먼저 넘지 말라고

I can fly the sky Never gonna stay

내가 지쳐 쓰러질 때까진 ~~~~~~~

원하는 대로 다 가질 거야 그게 바로 내 꿈일 테니까~



듣고만 있어도 내 온 힘을 끌어 모아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지는 '시작'이 두 번째 곡이었습니다. 심장을 쿵쿵거리는 흉내를 내면서 눈에 힘을 주는 따님을 보니 도전하는 마음이, 즐기려는 모습이 불안감보다 살짝 더 커 보이는 것 같아 참 좋았습니다. 우리 옆을 훅하고 지나쳐 앞으로 달려 나가는 버스 안이 빗물 젖은 창문 안으로 들여다 보였습니다. 새벽을 달리는 사람들이 하늘로 손을 뻗고, 머리를 흔들면서 함께 경쾌하게 리듬을 타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곡은 지오디의 '촛불 하나'. 비트도, 노랫말도 익숙한 노래라 함께 따라 불렀습니다. 마음속으로 슬쩍 가사를 바꿔서 말이죠.


'이번 생에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란다. 그래도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유일한 건, 지금처럼 불안하고 힘들고 지치려고 할 때 아빠한테 기대. 혼자라는 생각 말고 기대. 우리 따님이 잘하는 것처럼 혼자 터벅터벅 앞서 걸으려는 나를 먼저 손잡아 끌어 같이, 그렇게 같이 아빠도 걸어줄게.'


라고 말을 하는 눈빛으로 옆에 앉아 눈을 감고 노래를 따라 하는 따님 왼손을 끌어 꼭 잡았습니다.



마지막 곡이 흘러나올 때쯤 차는 붉은 벽돌 건물이 줄지어 서 내려다보는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방학 때 잠깐 다녀왔던 낯선 나라에서 난생처음 나갔던 교회에서 듣고 마음에 남게 되었다는 CCM, 'One Way'가 차와 우리를 아주 가볍게 밀어 올려다 놓아주었습니다.


차가 멈추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따라간 교회에서 가슴을 울렸다는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차창밖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 파이팅 하고 붉은 건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어쩌면 그 노래 때문에, 그 노래와 함께 있던 사람들 덕분에 자기가 걸어갈 길을 결정하는 데 은근히 큰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늘 그렇듯이.

모든 게 다 촉촉하게 젖어 있던 토요일 이른 아침. 경사진 골목골목이 여전히 잠들어 있던 시각. 멍하니 차창밖으로 사라지는 따님을 따르던 시선이 바닥을 굴러가는 나뭇잎을 만났을 때 문득 '쫌쫌따리'라는 말이 폭하고 떠올랐습니다. 언젠가 수시 면접 준비를 도와주면서 페이퍼 첨삭을 해주던 아이들한테 배운 말이었습니다.



작고 하찮은 양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모으는 태도*

*네이버 오픈사전PRO



어떤 시험도 다 고됩니다.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추는 연습을 하는 게 시험이니까요. 내가 가진 것을 내보이는 게 아니라 원하는 대로 '맞춰' 주어야 하는 것이어서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역할 때문에 수많은 시험을 출제하고 채점하면서 느낍니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나보다는 남을, 지금보다는 미래를 걱정하느라 정작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 만나고 있는 것들을 너무 쉽게 지나쳐 버려도, 그때마다 다 이유가 있었어도, 지나고 나서 보면 후회 투성이라는 것을!


사실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결과를 안고 사는지 다른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으면 합니다. 정말 제대로 자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음악이야기를 잠깐 다시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플레이 리스트. 그 플레이 리스트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내 것이 아니죠. 내 삶이 아니죠. 들어도 같은 감동을 받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 책, 명언, 진리, 가치..... 아무리 흘러넘쳐도 내 이야기가 아니면 내 것이 되지 않죠.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비슷한) 이야기에 감동하니까요. 그 감동으로 각오를 다지고 실제로 행동하게 되니까요. 좀 더 살다 보니 알게 되더군요. 그 수많은 것들 중에 내 삶에 정말 와닿는 사람은 몇몇, 책은 몇 권, 노래는 몇 곡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들에서 흘러나온 몇 개의 문장처럼만 살아도 정말, 제대로 잘 사는 거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부터라도 자기만의 리스트를 조금씩 조금씩 꾸준하게 모아 보세요.

그게 영어 단어를 모은 것이건, 마음이 편안해지는 노래를 담은 것이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약속이건, 자기 꿈을 썼다 지운 것이건 다 좋습니다. 어떤 리스트이건 자신을 이로운 방향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면 무엇이건 다 괜찮습니다. 노트에, 메모지에, 온라인 일기장에 조금씩 꾸준하게 기록해 두세요!


엄청난 레시피를 기록해 놓은 자기만의 비밀 노트를 갖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러는 과정에서 같은 노래를 듣고, 웃고 울고, 토닥여 주는 몇몇의 사람들을 정말 소중하게 대하세요. 소중한 건 아끼는 거잖아요. 막 대하지 못하잖아요. 그 소중한 이들과 몇 권의 책을, 몇 개의 문장을 나누어 보세요. 그러면 삶이 깊게 공유될 거예요. 그 공유의 힘은 '쫌쫌따리'하게 사는 데 매우 소중한 연료가 됩니다. 그 연료를 가득 채우면 '전투력' 게이지는 매일 충전 가득한 상태인 것이랍니다.


시험이 다 끝난 오후. 따님이 짧은 메시지를 하나 보냈습니다.



Retry



조금씩 조금씩 온 세상을 아무도 모르게 내리는 듯 부슬부슬 내리는 안개 비는 검은 길바닥도 붉은 벽돌도 알록달록한 우산도 더욱 자기 색깔을 더 진하게 띠게 적셔 주고 있었습니다.




[한 줄 실천]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일도 넘쳐나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쫌쫌따리하게 나를 신경 쓰고 챙기고 아껴야 하는 건 그래서 나 자신이랍니다. 자신만의 리스트 작성,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지담_글 발행 예정 요일]

토(외출전 발행) : 아빠의 편지

일(외출전 발행) : 아빠의 편지

월(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월요일 새벽에는 브런치 성장 일지 [브런치 덕분에]를 발행합니다)

화(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수(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목(출근전 발행) : 고3의 기술

금(출근전 발행) : 고3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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