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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때 묻지 않았더라면...

[ 고3의 기술 ] 10

by 정원에

5층 교무실에 도착하면 보통 아침 7시가 조금 넘어요. 정해진 출근 시각보다 한 시간 반 정도 일찍 도착합니다. 뒤쪽으로 돌아 서 있는 건물이라 보통 계단이 여름에도 어둑합니다. 그래서 2층부터 한 층 씩 올라가면서 불을 켜는데 이 기분이 꽤나 좋습니다. 밤새 웅크린 건물을 직접 깨우는 듯한 느낌이 참 신선하거든요. 건물 전체의 하루가 '딸깍'하고 제 손에서 시작되는 듯 한 감격스러움은 매일 얻는 덤이고요.


그런데 그 시각에 어둠 속에서 새어 나오던 자그마한 불빛이 딸깍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큰 불빛 안으로 얼른 파묻히는 것을 느낀답니다. 교실 안에 이미 등교해서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몇몇 있거든요. 3층, 5층에 한 명, 4층에 두 명. 수시 원서 마감날도 그렇게 하루를 온전히 켜면서 출근을 했었습니다. 접수 기간이면서 동시에 특별 전형으로 접수한 아이들이 증빙 서류를 대학 측에 우편으로 발송하는 업무도 함께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죠.


각반 담임 선생님은 이미 접수한 반 아이들에게 행정 절차에 맞게 도와주고 있었지요. 정해진 날짜까지 우편이 끝내 도착하지 않으면 불합격 처리될 수도 있거든요. 학급마다 휴일 전날 점심 무렵까지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교무실은 마치 바자회가 열린 동네 공터 같았어요. 접수 마감날. 그렇게 우리 반 아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일과를 마무리할 때였습니다. 썰물처럼 휑하니 다들 빠져나가고 혼자 남겨진 뒤 작은 해방감에 급격하게 피곤해졌습니다.


이럴 땐 꼭 엠에스지가 당기죠. 서랍을 열어보니 컵라면이 하나 보이더군요. 오랜만에 컵라면에 물을 부었습니다. 오후 커피도 연하게 한 잔 내렸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새벽에 읽다만 부분을 이어 읽으려 했죠. 이럴 때 느낌이 참 좋잖아요. 무언가를 끝내 놓고 나에게만 집중하면서 토닥거리는 기분이. 정신없다가 돌아 앉아 탁, 하고 심호흡을 하는 것 같은 이럴 때가요.


30분 정도 더 읽다가 나가면 40분 정도 떨어져 근무 중인 아내 퇴근 시간을 여유 있게 맞출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때 문이 스르륵 열렸습니다. 작은 미닫이 문은 두 번에 나눠서 조심스럽게, 천천히 열렸습니다. 그 사이로 얼굴 먼저 내민 아이는 푹 눌러쓴 모자와 다 가린 듯 한 마스크에 가느다란 눈만 보였습니다. 그 눈도 완전히 다 감은 듯 가로로 두 개의 줄이 나란히 그어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누구니?' 했더니 '원서 쓰려고요' 하면서 동문서답을 하더군요. '어? 시간이 다 끝나가는데' 했더니 '죄송합니다. 빨리 접수할게요.' 하더군요. '몇 반이니?' 물으니 몇 반이라고 대답은 합니다. '이름이 뭐니?' 하니 아무개라고 합니다. 제 수업을 듣지 않는, 낯선 아이였습니다. 대부분 이렇습니다. 자신을 잘 설명하지 않아요. 먼저 묻지 않아요. 아니, 못합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 이렇게 하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묻지 않습니다.


묻지 않으면 대답해 주지 않죠. 물론 물음에 단답이라도 대답을 해주는 것도 어떤 경우에는 고마울 뿐입니다. 그렇게 이십 분 넘게 제 자리 옆에 주르륵 있는 학생 접수용 컴퓨터 3 대중 가운데에 앉더군요. 모른 척 창가 쪽 자리에 서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잠깐 앉아서 책을 읽었습니다. 얼마뒤 다시 일어나 책을 읽었습니다. 허릿병 때문에 하루 6시간 정도는 서서 근무하는 중이거든요.


5층에 있는 아이들 대부분은 저를 '서 있는 선생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몇은 자동으로 오르내리는 제 책상을 신기한 지 힐끔거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잠시 뒤 그 학생이 흐느끼는 게 들리더군요.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 같은데, 소곤거리는 그 사이사이에 한숨소리에 섞여 있었어요. 묻고 싶었지만 통화 중이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이십여분이 넘게 통화가 이어져 '얘야? 접수 마감 시간이 끝나가는데?' 하고 일부러 말을 걸었습니다.


접수 마감이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었거든요. 그제야 모니터 위로 초록색 코르덴 모자챙이 쑤욱 올라옵니다. 그 사이로 두 개의 줄 같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면서 쳐다봤습니다. '어, 저 아이?'. 그랬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등교해서 작은 불빛 아래 웅크리고 있던 5층 여학생이었습니다. 아빠가 일찍 출근하면서 학교에 떨구고 간다고 표현했던 아이죠.


문제는 그 아이 역시 특별 전형 관련 서류를 증명받아야 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좀 전에 막 접수를 한 두 개의 대학 모두가 그 전형이었습니다. 업무라는 게 내용보다는 형식이 중요할 때가 있어요. 접수한 후 생성된 파일을 출력해서 '도장'을 받는 게 문제였죠. 여전히 신뢰와 권위, 법적 효력의 발생 요건이 '도장'이거든요. 의미를 두지 않으면 아주 번거로운 절차입니다.


00 이에게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해 보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아이가 상황 설명을 한 뒤 잠깐 바꿔 제가 다시 통화를 했죠. 시간 내에 못 오신다는 선생님과 통화를 끝내고 잠깐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곤 그날만 그 아이의 담임교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특별 전형 증빙 서류에는 학교의 고유 일련번호가 해당 학생별로 부여됩니다. 그 번호가 부여되고 직인과 확인 도장이 있어야 유효한 서류가 됩니다.


그런데 대학 입장에서 보면 확인 도장의 담임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처리해 본 게 처음이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결정한 후 학교 직인 담당자가 있는 행정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그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는 붉어져 있었습니다. 숨소리가 불안하게 느껴졌죠. 익숙한 저도 속으로는 급한데, 생전 처음인 아이는 오죽할까 싶었습니다.


'자, 여기에 이렇게 써. 초, 중 생기부 가지고 있지?, 주민등록 초본 가지고 있지?' 이렇게 두 마디를 물었는데 급기야 00 이의 볼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집에 있답니다. 모든 서류가 다. 그때는 정말 '야? 뭐야?'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거니까요.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귀담아듣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내가 그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름이 뭐라고 했지? 그래 00야. 일단, 심호흡. 자, 해봐 후, 후. 됐어. 침착하자, 우리. 별일 없다, 없어. 다시 후, 후. 좋아. 이렇게 하자." 하면서 행정 처리 절차를 써주었습니다. 폰을 꺼내 찍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처음 하는 일이면, 당황하면, 마음이 급하고 불안하면 누구나 자주 그럽니다. 잘 듣고, 알았다고 하곤 놓고 갑니다. 잃어버립니다. 어디에 올려두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찍으라고 한 겁니다.


그렇게 00 이는 1층 행정실에 내려가 학교 직인만 먼저 받아 5층으로 다시 올라왔습니다. 직인 위 확인 교사란에 제 도장을 천천히, 마음으로 눌러 찍어주었습니다. "00야, 내가 이제 너의 인생에 살짝 끼어들었는데, 어, 어떡할 거니? 그런데 정말 다행이다. 내가 늑장 부리면서 이렇게 남아있을 때 네가 와서 말이다. 아침에 일찍 학교에 온 덕에 이런 인연이 생긴 거네. 앞으로 살면서 확률보다 인연을 믿어봐라. 그러면 되는 거다."


그제야 00 이는 검은 마스크 위로 붉어진 눈두덩이가 살짝 오므려졌습니다. 저도 같이 오므리면서 '살다 보면 의외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우연한 인연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하는 말은 제 안으로 삼켜 넣었습니다. '빨간 직인 위에 살짝 걸친 진한 (인). 그 뒤에 투명하게 '연'이라는 글씨가 혹시 보이지 않니?'하고 실없는 농담이 툭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면서 말입니다.




"제가 인쇄를 하면서 배우는 게 있어요. 일이 쌓이는 만큼, 인연도 쌓인다는 것. 그래서 우리 집에는 영업사원이 없어요. 이렇게 손잡았던 친구들이 다른 곳에 나를 알아서 소개해 주거든. " _백창현 청산인쇄 대표, 2024, 롱블랙 인터뷰에서




일이 쌓이는 동안 인연도 그만큼 쌓이는지, 그렇지 못한 지는 스스로를 돌아보면 알 일인가 봅니다. 30년 넘게 한 가지 일만 멈추지 않고 꾸준하게 하면 알게 되는 가 봅니다. 그제야 아이의 표정이 보였습니다. 여전히 마스크로 얼굴을 전부 다 가린 듯했지만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는 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들어올 때 와는 달리 부리나케 문을 열고 나가는 00 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앉았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는데 그제야 떠올랐습니다.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 어, 어, 아내 픽업?" 할 시간이.... 절반 남았던 컵라면이 다시 컵에 한가득 되어 있는 것을 손에 들고 얼른 교무실을 나섰습니다. 그러다 그 아이가 아침마다 불을 밝혔던 어둑한 교실 창을 잠깐 들여다봤습니다. 미소가 흘러나왔습니다.




[한 줄 실천]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 없이 잘 물어보는 연습을 하세요. 묻지 않으면 인연을 놓칠지도 모릅니다. 인연은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관계가 아닙니다. 삶의 깊숙한 곳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세상과의 연결고리랍니다. 인연도 스스로 만드는 겁니다.




[지담_글 발행 예정 요일]

토(외출전 발행) : 아빠의 편지

일(외출전 발행) : 아빠의 편지

월(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월요일 새벽에는 브런치 성장 일지 [브런치 덕분에]를 발행합니다)

화(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수(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목(출근전 발행) : 고3의 기술

금(출근전 발행) : 고3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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