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였지요. 앞자리 선생님이 웃으면서 혼잣말처럼 그러더군요. '이런 자기소개서는 처음이네요, 처음'하고.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학생이 자기 가족 소개를 하는데 그랬답니다. '열한 살, 말이 없고 우리 집에서 가장 밝음. 언제나 웃고 있음. 항상 내 옆에서 나를 지켜줌'. 그래서 누굴까 했답니다. 그런데 그 아래 '하는 일'에다 '하루 종일 혼자 집을 지킴'이라고 써놨다네요.
저는 말이 없고, 가장 밝음 부분에서 이미 혼자 눈치를 챘습니다. 반려견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다섯 중 저만 반려인이었던 겁니다. 교감 역할을 하는 지인이 언젠가 그랬습니다. 아침에 출근은 한 한 분(임용된 지 삼 년 차)이 안 좋은 표정으로 그랬답니다. '오늘, 어쩔 수 없어 출근은 했는데, 며칠간 근무를 못할 것 같습니다.' '아, 왜 그러신가요?' 그랬더니, '네, 어제 우리 강아지가 죽어서....' 하면서 말을 잊지 못하고 교무실에서 눈물을 흘렸다는군요.
반려인이 아니었던 그 지인은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네요. 타닥이(가족들이 부르는 이름은 '코코'예요. 그런데 새벽마다 거실 바닥을 뛰어 저에게 달려오는 소리가 마치 알람처럼 들려서 이렇게 부릅니다. 알람 소리도 기분 좋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요)는 우리 가족과 같이 살고 있는 아홉 살 몰티즈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새벽에도 방금 저를 찾아와 비비고 안기면서 따스한 온기와 꼬릿 한 냄새를 풍기고, 새벽밥을 한가득 먹고 다시 자러 갔습니다. 반려인들은 이런 경험이 있으실 텐데요, 온 식구들이 매일 투닥거리는 것 중 하나가 어젯밤에 다 자기와 같이 잤다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타닥이와 함께 산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타닥이가 저에게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많은 것들은 결국 하나로 흐르고요. 우리는 서로 언제 어떤 순서로 헤어질지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는 타닥이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옆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손을 핥고, 까만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새벽밥 준다고 엉덩이 댄스를 치고, 이 냄새 저 냄새를 맡으면서 황홀경에 빠지듯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
타닥이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타닥이의 삶의 형식은 언제나 '오늘'입니다. 매일이 '오늘'입니다. '오늘'에만 집중합니다. 타닥이에게 오늘은 어제와 같지 않은 오늘입니다. 오늘의 고유한 공기와 햇살, 구름, 바람이 이어주는 걸 올곧게 다 가져가는 오늘에만 삽니다. 어제를 반성하지 않아, 과거의 아픔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오늘을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다가올 미래에 쓸데없는 상상력을 발휘하지도 않죠.
타닥이를 안으면, 쓰다듬으면, 신나게 실룩거리는 엉덩이를 뒤따라 산책을 하다 보면 불현듯 어제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과정일 뿐 인 것처럼 오늘을 대하는 저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타닥이는 오늘은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타닥이하고만 있으면 근심과 불안이 없어집니다. 타닥이가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남매들이 가끔 '타닥이처럼 살고 싶다'라고 하는 이유일 겁니다.
어제 늦게 들어오는 아내를 맞이한 뒤 평소보다 두 시간 가까이 늦게 잠들었습니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아도 타닥이는 엄마방에서 새벽 4시에는 제 옆자리로 다가옵니다. 잠결에도 뜨끈한 콧바람 소리와 냄새가, 엉덩이의 온기가 느껴집니다. 그러면, 아 지금 4시겠구나 합니다. 오늘은 늦잠을 자는 저의 옆에서 벌렁 누워 자기 등을 내 겨드랑이와 옆구리에 블록처럼 탁 맞추고 나를 기다립니다.
타닥이와 같이 살기 전에는 생각으로 알았습니다. 같이 산다는 게 뭔지. 타닥이와 살면서 마음으로 느낍니다. 같이 산다는 게 뭔지. 그 덕에 그 마음을 더 표현하고, 행동합니다. 같이 사는 가족이라는 게 이렇게 서로의 오늘에 집중하고, 오늘 안에서 서로를 쓰다듬고, 오늘 한번 더 안아주고, 오늘이 다 가기 전에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사이라는 것을 이 새하얀 심장덕에 잊을만하면 느끼게 됩니다.
'타닥이처럼' 오늘에 집중하는 연습. 1년이 아니라 매일 생각과 행동 그리고 마음 간의 오차를 보정해야만 하지만 그래도 그 연습을 흉내라도 낼 수 있어, 하루 더 생긴 오늘이 그저 고맙고, 행복하기만 합니다. 어제 내가 어떤 아들, 딸이었는지, 아빠, 엄마였는지, 남편, 아내였는지 그리고 내일 또 어떤 친구일지는 오늘 내가 어떻게 쳐다 보고, 무슨 말을 건네고, 어떤 손짓을 하는지가 다 말해준다고 타닥이는 매일, 오늘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게 아닐는지.
여러분의 인생에서 몇 번의 졸업식이 있으셨지요? 그때 어땠나요? 어떤 다짐을, 어떤 시원섭섭함을 느끼셨나요? 졸업식은 첫걸음을 걷는 것을 기념하는 세리머니입니다. 졸업식이 끝나고 단체톡에 이제 우리 헤어지자,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 번씩 나누고 이 톡방을 나가자,라고 하면 많은 아이들은 일제히 그럽니다. '다 같이 오늘도~' 해주세요 쌤' 하고.
'예쓰겠습니다'. 일 년 내내 반 아이들과 조례, 종례 때 나누는 인사말입니다. 이 인사를 몇 번을 하면, 졸업이야 하고 말해 주면 아이들이 하루하루 줄어드는 것을 느끼는 눈빛이 더 또렷해집니다. 시원섭섭함을 하루하루 느끼면서. 항상 예스 yes의 마음으로 매사에 애써보자고 당부하는 말입니다.
'오늘도'하고 제가 먼저 인사를 하면, 열아홉 아이들은 '예쓰겠습니다'하고 외칩니다.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면서요. 첫날 저의 부탁입니다. ‘마음과 힘을 다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힘쓰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이 어제보다 좀 더 나아진 하루를 보내는 작지만 마음에 천천히, 오래도록 스며드는 '좋은 연습'을 같이 하자고.
오늘도 애쓰다 보면 알게 됩니다. 세상 속에는 수많은 졸업식이 존재한다는 것을요. 그토록 바라지만 잘 오지 않는 졸업식도 있고, 그 반대의 졸업식도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다 결국 우리 삶의 졸업식은 오직 단 한 번이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너무 애쓰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제대로 애써본 경험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 말입니다.
우리는 매일 서로를 끊임없이 만납니다. 그냥 들여다보지 말고 멀찍이 떨어져 보면 분명, '열아홉', 참 좋은 나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조금 더 자세히 오래 만나 들여다보면 불안과 걱정과 두려움이 한가득 한 나이이기도 하죠. ‘마음과 힘을 다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힘쓰는’데 쉽지 않은, 열아홉.
하지만 그 나이가 좋은 진짜 이유는 좋은 연습을 많이 할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아무거나 먹지 않기, 잘 듣기, 잘 사과하기, 운동하기, 몰아서 하고 몰아서 쉬기, 잘 정리하기, 다짐하기, 반성하기, 다시 시작하기, 나보다 남을 더 챙기기, 나누기, 손잡기, 안아주기, 먼저 인사하기....
연습이란 실패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어른이 되고 나면 연습이 잘 안 되는 이유입니다. 시간이 없다고 안되고, 마음을 담을 여유가 없다고 안되고, 어른이어서 안되죠. 너저분하게 바쁜 사람이 어른들이니까요. 열아홉! 지금이 연습하기 딱 좋은 시기입니다. 자기 자신을 격려하고, 누군가를 위로하고, 누군가로부터 받은 배려에 감사하는 연습. 우리가 만나는 누구라도 무엇인가와는 끊임없이 고단하게 투닥거리는 중이거든요.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실험이 하나 있습니다. 대장내시경 실험입니다. 실험 대상을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두 그룹의 차이는 내시경 검사 이후에 있습니다. 한 그룹은 대장내시경 검사 후 바로 내시경 호스를 제거합니다. 다른 그룹은 5분 정도 있다가 제거합니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하죠. '건강을 위해서 다음에도 이런 방식의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을 의향이 있느냐고?'
결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5분 정도 있다가 제거한 그룹이 바로 제거한 그룹보다 2배가 넘게 긍정적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했죠. 이런 결과는 어디서 오는 차이일까요? 저는 타닥이의 눈빛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바로 지금이라고 부르는 '오늘'에 어떤 경험을, 연습을 했느냐에 따른 차이가 아닐까 하고요.
여러분은 어떤 연습을 하고 싶으신가요?
내일 찾아 올 '오늘'이 오늘보다 좀 더 나아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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