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 주의보가 경보로 바뀌었던 날이었습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이어지는 시각. 이런 핑계, 저런 꾀를 부리며 한참을 망설이다 러닝 머신에 올랐죠. 그나마 (남보다는) 나를 설득하는 게 조금은 수월하니까요. 밤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을 정면의 TV를 켰습니다. 먼저 오른 이가 마지막으로 들여다본 채널에서 40세의 한 독일 여성이 (기억은 안 나는) 어떤 '슈퍼푸드'를 먹고 당뇨가 아주 좋아지고 있다는 인터뷰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공원을 산책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 오른쪽 아래 화면. 빨간색 바탕에 흰색 숫자로 그날 아침 기온이 지역별로 수시로 바뀌면서 표시되고 있었습니다. 원주 -15°, 강릉 -11°, 춘천 -15°, 광주 -6°, 대구 -9°, 부산 -7°, 제주 -0°, 서울 -14°, 전주 -9°, 청주 -12°, 울산 -8°, 의정부 -14°.
그날은 여기저기서 '춥다', '춥다' 소리가 들렸어요. 제가 10대의 마지막 3년을 머물렀던 -11°의 강릉에 사는 친구도, 뉴스 속 0°의 제주도 주민도, -15°원주에 사는 지인도 '추워'했죠. -15°와 0° 사이에는 '추운 정도'가 15배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원주에 사는 지인은 제주도 주민보다 15배나 더 추운 걸까요? 거꾸로 제주도 주민은 원주에 사는 지인보다 훨씬 덜 춥다고 느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연, 인문) 현상에 대한 노출 빈도가 다 다릅니다. '우리 동네'라고는 부르지만 그 동네가 지닌 조건들이 다르니까요. 땅이 다르고, 하늘이 다르고, 길이 다르고, 건물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죠. 그것들 사이에서의 경험 역시 다릅니다. 그것들과 내가 교류하는 '감각의 경험' 정도가 다 다른 거죠. 무엇을 보고, 만지고, 교류하고, 듣고, 느끼고, 주고받는지에, 그것에서 어떤 영향을 받아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상에서 얻게 되는 차이 말이다.
여러분이 크고 작은 '결정'을 하는 순간, 순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의외로 '우리 동네'라고 부르는 특정 지역의 익숙한 타인들(헬스장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자주 마주치는, 스터드 카페 구석진 자리에 항상 제일 먼저 와 등지고 앉아 있는, 하천변을 뛰다 자주 스치는 , 등하굣길에 자주 마주치는,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인사 나누는)과도 알게 모르게 나의 작은(때로는 꽤나 큰) 결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겁니다. 분명한 건 (전혀 모르는) TV속 그 독일 여성보다는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익숙한 타인들보다 더 크게 영향을 받는 대상들이 있죠. 나이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만의 삶의 기준이 생긴 지점(시기). 그때 함께 감각의 경험을 했던 사람들, 장소에서 기인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동네'에 떨어져 살지만 단박에 나를 위해 달려와 줄 것 같은 친구와 지인들(7년 만에 다시 연락이 된 초등학교 동창, 길 가다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친 중학교 친구, 나보다 기수가 아래인 고등학교 후배)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요.
분명한 것은 동네 러너-저처럼 동네에서 달리기 하는 아마추어-는 절대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을 한 선수를 자신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멕시코시티에 사는 누가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는 건 나를 돌아보게 하지 못합니다. 다른 학교의 전교 1등은 나에게 의미가 없죠. 나에게 가장 좋은 자극제는 항상 내 옆에(마음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가장 나쁜 자극제도 언제나 나와 함께 하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여러분의 '선택'은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을 나와 동등한 또는 조금 낮은 대상이라고 내가 임의로 정한 '기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좋아진 성적이, 혈색이, 인상이, 건강이, 성공이 그런 기준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지요. 그들이 만약 시험과 면접을 통과하고, 자격증을 획득했다면 여러분의 '무모한' 확신은 더 강해집니다. 슈퍼푸드를 먹어 당뇨가 완치되었다는 독일 여성에게서 보다 훨씬 더 크게 말이죠.
그런데 이러면 실패할 가능성은 더 커집니다. 어쩌면 당연한 결괏값일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자기 성장을 위한 기준이 항상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출발선이 그때마다, 상황마다, (기준으로 삼은) 대상에 따라 자꾸, 자주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3시간이라고 하더라도 3시간'만' 공부한 날도 있고, 3시간'이나' 공부한 날도 있게 되어 버리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자꾸 자신의 성장 기준을 '외부'에 두게 되면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치는 거대한 풍선 같은 상황이 자주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신선한 자연 바람 대신 돈 들여, 시간 들여 헬륨을 채워 넣느라 내 목소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된. 게다가 아주 자그마한 바늘(충격) 하나에 퓨슈슉 지나온 시간이 한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항상 내재하고 있는 덩치만 큰 풍선.
오늘도 '성장'하고 싶은 거죠?
그렇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다 아는 방법이지만,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선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자신의 '어제'하고만 비교하세요. 어제보다 얼마나 더 했는지, 어제보다 얼마나 덜 했는지, 어제보다 얼마큼 깊어졌는지, 어제보다 얼마만큼 덜어내었는지를 말입니다.
'어제보다' 좀 더 나아지고 싶으면 '어제의 나'하고만 비교하면 그만입니다.
어제보다 SNS를 얼마나 덜 했는지,
어제보다 책을 얼마나 더 읽었는지,
어제보다 말을 얼마나 더 줄였는지,
어제보다 문제를 얼마나 더 풀었는지,
어제보다 시간을 얼마나 더 투자했는지,
어제보다 잡념을 얼마나 더 제거했는지,
어제보다 음식을 얼마나 더 잘 챙겨 먹었는지,
어제보다 엉덩이를 얼마나 더 오래 붙이고 앉았는지,
어제보다 잠을 얼마나 더 깊게 자려는 준비를 했었는지,
어제보다 긍정의 마인드를 얼마나 더 많이 가지려고 기록했는지...
러닝머신 위에서 살짝 생각만 했는데도 소름이 올라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요. 그래서 오늘도 또다시, 다짐하게 됩니다. 오늘도 나이쓰를 외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말이죠. 속도도 양도 방향도 절댓값이 아닌 나만의 상대값 찾기에 혈안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열중해서 자기 값을 찾은 이들은 결코 그 값을 사랑하는 이들한테 (아무리 좋아도 내 방식만으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살기로 결정한 기준 시점, 기준량이 오로지 과거의 나에게서 찾으면 됩니다. '이 정도'로 살기로 결정해야 그렇게 살아지는 거니까 말입니다. 살아가는 게 정답은 없다지만 나한테 맞는 해답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해답이 나를 살리고, 성장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 것이 아닌 기준에 정신적으로 두리번거리다 아까운 내 시간이 그냥 지워져 버리지 않게 말입니다.
오늘도 어제의 자신에게만 말을 걸어 보세요!
[지담_글 발행 예정 요일]
토(외출전 발행) : 아빠의 편지
일(외출전 발행) : 아빠의 편지
월(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월요일 새벽에는 브런치 성장 일지 [브런치 덕분에]를 발행합니다)
화(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수(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목(출근전 발행) : 고3의 기술
금(출근전 발행) : 고3의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