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투표 첫날 퇴근길에 16대 - 19대 대선, 18대-21대 국회의원 투표소였던 동일한 건물 앞으로 갔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습니다. 하지만 3층 투표소로 올라가는 줄이 건물 밖으로 한참을 빠져나와 인도까지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다음 날 저녁, 사전투표율은 역대 최고였다는 뉴스가 채널마다 흘러나왔습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이 결정되는 아주 중요한 날이지요. 그런데 우리 반 34명의 장정들도 이번 주는 공식 선거운동 기간입니다. 금요일 5교시는 나의 16번째(16대) 학급 대의원(예전의 반장, 부반장입니다)이 결정되는 선거일입니다. 입후보한 학생들은 남학생 1명, 여학생 2명입니다. 입후보자들은 입후보 신청서와 공약을 작성해서 제출해 두었습니다. 3월 초 2주간 임시 학급회장, 부회장 역할을 맡아주는 아이들과 제가 선거관리워원이 됩니다.
저는 교직 첫해부터 학급 대의원을 정하는 절차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학교에서는 행정적으로 3월 첫 주가 지나고, 두 번째 주에는 학급 자치 조직표를 구성해서 제출하라고 합니다. 매년 학사일정에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서로 알기도 전에, 약삭빠른 아이들이, 또는 아이들의 사전(?) 정보를 알고 있는 선생님이, 또는 선생님이 편한 대로 특정 아이가 반장, 부반장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바로 '깜깜이 선거'입니다. 물론 어떤 해에는 별문제 없이 정말 괜찮은 아이가, 정말 아이들을 '대표'하는 아이가 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절차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사실 현장에서 면밀히 고민하고 토론하는 깜에도 속하지 못합니다. 그것보다 훨씬 급하고,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넘쳐나니까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선생님은 차치하고라도 아이들의 '기억'속에 대의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상실됩니다. 다행히 성장을 하면서 사회화 과정 속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선거의 중요성을 판단할 수 있다면 정말 다행입니다만. 우선은 아이들의 '대표'가 아닌 말 잘 듣는, 범생이 '선생님 편' 반장이 뽑히기 다반사였습니다. 저도 그중의 한 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선생님의 심부름꾼이었고, 아이들을 잡아오고, 보고를 빙자해서 일러줘야 하는 역할을 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에 와서도 '범생이처럼'이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몸을 지배하게 만드는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물론 이래저래 좋은 점과 불편한 점이 뒤섞인, 평범한 인생입니다만.
두 번째는 선거운동을 해본 경험이 없어집니다. 출마한 아이의 입장에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고 싶고,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그것도 곧 면접이고, 스피치고, 설득의 심리학인데 말이지요. 운동회 전날 밤에 머리맡에 하얀 운동화를 놓아둔 그 기억이 없는 겁니다. 약간 긴장되고, 설레고, 좌절하고, 성공했다는 그 기억이. 그러니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뽑아야 하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보는 눈이 길러지지 않습니다. 공약의 중요성이 와닿지 않습니다. 뽑히고 난 다음에 토론이 이루어지는 기회가 사라집니다.
그러다 보면 10대 때 이미 뽑고, 뽑히는 게 시큰둥 해집니다. 하고 싶은 아이도, 뽑고 싶은 아이도 서로 별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 아이가 될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일로 바빠서 누가 되건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은근히, 오랫동안 자기들 의식을 지배하면서 성장을 해 가게 됩니다. 뽑고 뽑히는 과정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으로 말이죠. 그 '아이'가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될 뿐이지요. 이번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어떤 후보가 연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던 게 생각이 납니다. '이게 국민학교 반장선거입니까?'하고.
그 후보의 학창 시절 기억 속의 '선거'역시 제가 경험했던 '깜깜이' 선거였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직을 시작하면서 본능적으로 우리 반 선거를 학급 모든 아이들이 집중하고, 함께 뽑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조금은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입후보 신청서를 받고, 공약서를 받고, 일정기간 선거 운동 기간을 두고, 아이들 앞에서 공약을 발표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매년 공약이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세련되어 가는 느낌입니다. 어떤 대통령 후보의 공약에 못지않게 그 철학은 그대로 반영됩니다.
우선, 대부분의 입후보 아이들이 내세우는 공약은 '소통하는' 학급 대의원입니다. 올해 공약서를 제출한 셋 중 두 명의 아이도 그렇습니다. 한 아이는 '소통팀' 팀장을 자청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받아내고, 선생님과 단판까지는 아니더라도 건의하고 조율하겠다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내는 방식 중 아이들이 가장 신나면서도, 긴장하고 좋아하는 게 '자리배치 투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자리'는 참 중요하니까요. 아이들이 알아서 자리 선정 투표를 하고, 그 결과에 승복해서 일정기간 불편함을 감수해 나갑니다. 그러면서 다음 투표를 기약합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이 선호하는 자리에 앉은 아이도, 불편한 자리에 앉은 아이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름다운 양보와 배려도 종종 나타납니다.
그다음으로 등장하는 공약이 '편안한' 교실을 만들겠다입니다. 그러면서 사물함 하나를 비워, 아이들이 자주 쓰는 비품을 몇백 원씩, 일이천 원씩 학급비를 자발적으로 걷어 채워놓습니다. 컴퓨터용 싸인펜, 화장지, 여성용품, 핸드크림, 선크림 등은 물론 어떤 해에는 먹거리도 제공하더군요. 그리고 그것을 쓰는 우리 반 아이들 누구나 당당하게 사용합니다. 이게 바로 주인의식이지요. 그런 것들을 기획하고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성장해서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공무원이 되어서 한여름 그늘막을 설치하고, 자전거 도로 옆에 무료 얼음물 냉장고를 설치하지요. 우리 집 큰아이가 남고에 다닐 때 소리도 없이 학급회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6월 초에 알았던 적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면서 슬쩍 물어봤습니다. 공약이 뭐였냐고? 그랬더니 '체육대회 우승하는 반을 만들겠다' 했답니다. 그리고 실제 그해 교내 축구대회 준우승을 했답니다. 그 과정이 안 봐도 훤히 보입니다. 원팀이 되기 위해 애썼을 모습이. 그 속에서 생긴 작은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을지.
물론 담임의 입장에서만 보면 때로는 제가 마음속으로 밀어내던 아이가 학생들 대표가 되기도 했고, 마음에 들었던 아이가 되어서 아주 편하게 퇴근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나의 결론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은 경우도 왕왕 있었습니다. 밀어낸 아이가 듬직하게 성장하기도 했고, 마음에 들었던 아이가 담임을 더 불편하게 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저는 언제부터인가 저의 판단을 전부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매년 고2인, 고3인 아이들은 같은 나이지만 저의 물리적인 나이는 계속 아이들과 격차가 벌어지니까요. 요즘 아이들을 잽싸게 따라잡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학기초 성적으로, 낯설움으로, 개인적인 사정으로 주눅 들어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쌩쌩한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을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아이의 무의식 속에 누굴 뽑고 약속을 잘 지키는지, 우리 공동체가 옳은 방향으로 가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사라집니다. 아니, 처음부터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민학교 반장 선거가 중학교보다, 중학교 선거가 고등학교보다 더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야 나를 대신하는 그 '대표성'에 하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연대의 책임속에 공동체의 성장에 일조한다는 자존감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민주시민으로, 세계시민으로 성장하는 풀뿌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 모두는 '좋은 추억'을 곱씹으며 사는 존재들이니까요.
우리 반 장정들 34명 중 서너 명이 오늘 대통령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가 봅니다. 그 아이들이 자신이 믿고 지지하는 후보가 뽑히면, 국민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지, 대한민국 공동체를 위해 잘하는지를, 먹고 사느라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잘 지켜보고, 의견을 낼 수 있는,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진 시민으로 성장할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결과만큼, 금요일 우리 반 결과도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