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한 번뿐인 날

[ 나, 쓰며들다 ] 06

by 정원에

월요일 아침. 업무용 컴퓨터가 부팅되자마자 쏟아진 스물몇 개의 메시지들 속에서 부고 하나를 발견했다. 오래 같이 근무를 하다 얼마 전 전근 간 대학 선배의 모친상 알림이었다. 각별했던 선배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평소 휴대폰 문자로 오던 부고 알림이 어찌 된 일인지 업무 메신저로만 와 있었고, 다른 메시지에 묻혀 미쳐 보질 못했던 거였다. 부랴부랴 조의금이라도 보내야지 하고 링크를 클릭했다. 그랬더니 '해당 부고는 발인되었습니다'라는 안내만 덩그러니 떴다.


그제야 자세히 보였다. 야외 활동이 있던 날이었다 하더라도 평일 근무 시간이어서 문자가 아닌 업무용 메신저로 보낸 거였는데 다른 메시지에 묻혀 읽어내지 못했던 거다.


발인 날짜는 이미 이틀 전이었다. 늦게나마 조의금을 보내고 선배와 통화를 하면서 문득 '발인'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깊이 박혔다. 오십이 넘으면서 흔하지 않게 접하고 있는 표현이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발인에 담겨 있는 의미는 '떠나기 위한 출발'이다. 집을, 가족을, 친구를, 지인을, 이 세상을. 그랬다. 특별해서 보내기 아까웠던 날도, 기억 속에 깊게 간직되어 있는 날도, 하루하루 그냥 지워지듯 지나쳐 간 보통의 날도 모두 '어느 날'이었다.


건강 검진을 위해 병원을 갈 때마다 느낀다. 몇 개월 뒤, 때로는 1년 뒤 예약 날짜를 잡고, 출력된 미래의 날짜를 들고 언덕길을 내려오다 보면 불현듯 '어느 날'에 대한 상념에 잠기곤 한다.


지지난주 보고도 늘 '언제 한번 보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친구가, 한낮 교실에서 쓰러져 결국 일어나지 못한 젊고 유쾌하고 유능하고 유들유들하던 후배가 황망하게 떠난 날도, 오랜 시간 마음 고생하며 눈물짓던 친구 부부에게 아이가 찾아온 것도 '어느 날'이었다.


새로운 마음을 갖는 새해 첫날도, 새로운 날을 다짐하는 한 해 마지막 날도, 아내가 좋아하는 시월의 마지막 날도, 오늘 이후부터는 6개월에 한 번씩 만나자고 주치의가 이야기해 준 그날도, 크리스마스도, 결혼기념일도, 생일도 단 한 번뿐인 ' 어느 날'이다.


아니다. 평생 단 한 번뿐인 날이다. 다시는 되돌아와 볼 수 없는 보통의 하루. 이렇게 보면 내일 다시 '보자', 다음에 밥 한 번 '먹자', 시간 될 때 그때 다시 '만나자', 언제 어느 날 '다시 시작해 보자'는 수많은 약속은 '어느 날'이 꼭 와줄 거라는 확신이다.


하지만 갈수록 확신을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속도의 세상에 던져진 채 늘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간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속도를 무리해서라도 따라가야만 하는 것처럼 억지로 채워지는 듯한 '아무 날'이 많아진다.


며칠 전 아내와 10살이 되어가는 반려견 타닥이 정기 검사를 위해 늘 다니던 병원에서 무덤덤하게 던진 젊은 수의사의 한마디. '계속 나빠지는 거야 당연하니 추억 많이 쌓으세요'.


타닥이는 지금 건강하다. 신장이 좋지는 않지만, 나이 먹는 거에 비하면 이제 시작 수준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은 '추억'이라는 말에 눈을 껌뻑껌뻑할 수밖에 없었다.


타닥이를 만나기 전 강아지를 싫어하던 아내는 돌아오면서 그랬다. 잃어버린 후 아파하지 않고, 지금 충분히 사랑을 나누겠다고. 맞다. 그러면 된다. 그러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모두 '떠나기 위해 출발'할 존재이기에. '아무 날'에.


다 안다. 모든 날이 단 하루뿐인 날이라는 것을 알지만 모르는 척하고 싶을 뿐이다. 잊고 지낼 뿐이다. 그러면 안 된다. 바빠서, 시간이 지나서, 내 일이 아니어서 괜찮았던 수많은 타인의 죽음은 우리의 삶 속에 죽음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참 오랜 시간을 버렸다.



'아무 날'에 아무 일 없이 사랑하는 이들과 사랑을 잘 '표현'하자. 사랑하는 마음을 좀 더 자주 드러내자.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편해진 세상을 만끽하자.


집을 나갈 때 꼭, 더 자주 약속하자. '잘 다녀올게!'. 그 약속을 지킨 기적 같은 '아무 날'에 꼭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잊지 말자. '어, 다녀왔어. 수고했어!'. 목소리보다 눈빛으로, 포옹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한 상태'. 이런 상태가 매일 계속 유지되면 사는 것이 걱정될 게 하나도 없다. 그걸 우리는 언제나 바란다. 그 출발은 밋밋한 일상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사소한 기적이 아니라 그 기적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표현하는 데 있다.


일 년에 단 한번뿐인 날. 그 날이 오늘이다. 지난 2년간 새벽마다 글 친구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시각에 모임방에 '오늘도 우리 같이 안녕해요'라는 아침 인사를 올리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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