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지 모듬회, 고등어 초회, 피문어 숙회, 감태두른 새우 성게알
얼마 전 오랜 친구 부부와 오랜만에 함께 했다. 스무 살에 만난 우리 넷은 어느덧 오십 중반의 동갑내기 친구가 되었다.
친구와는 고향에서부터 만났다 떨어졌다 하면서 지금껏 함께다. 그러는 사이 결혼 전부터 이어진 25년간의 여자 친구들의 끈끈한 우정은 어쩌면 우리보다 더 진해진 듯하다.
두 분은 언제부터인가 매달 얼마씩 돈을 모아 왔다. 우리 남매와 친구네 형제들이 자라면서 꼭 일 년에 몇 번씩 맛있는 음식을 핑계 삼아 모이기 위해서다. 애주가인 친구와 건강식을 챙기는 그의 아내는 늘 최고의 장소를 찾아낸다. 저렴하고 한적하고 숨은 보석 같은 곳들을.
대부분 '여기 어때?'하고 아내한테 물어와 내게 전달되지만 언제나 나는 '좋지'한다. 그냥 좋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갔다.
그곳은 다름 아닌 친구네 집 근처 하천변에 숨어 있듯 자리 잡은 자그마한 선술집.
술을 잘 못하지만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좋아 다니다 보니 내게 잠시 붙었던 별명 아닌 별명이 '윤주발'이다.
주윤발 아니고, 안주빨. 술은 (잘) 못 먹는데, 자리는 좋아하는 나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이십 대의 윤주발이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과묵한 친구의 섬세한 배려가 느껴지는 '바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광어, 고등어, 피문어, 성게알, 연어알, 새우 그리고 김, 다양한 해초들
공교롭게도 우리 넷은 모두 바다와는 먼 곳에서 태어났다. 아내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우리 셋은 강원도 두메산골이 고향이다.
그래서 어쩌면 바다는 늘 마음속에 일렁이는 동경의 대상인가 보다.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달려가곤 했던 곳은 두 곳 중 한 곳이 바다였던 걸 보면.
광어의 찰진 식감, 고등어 초회의 산뜻함, 쫄깃하면서 달달한 피문어, 몽글거리면서 화한 향이 입안 가득 남아 있는 성게알, 톡톡 터지는 연어알, 촉촉한 새우살 그리고 고소한 감태와 다채로운 해초들.
잠깐 눈을 감으니 2021년, 아내와 재수 씨의 따듯한 마음 덕분에 친구와 단둘이 떠났던 제주도 올레길 여행이 떠올랐다.
마침 그때 나는 24년의 시간을 뒤로하고 낯선 곳에서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이었다. 허릿병 재활 치료 중이라 무작정 걷고 또 걸을 때였다.
바닷바람의 진한 향기, 보리밭의 내음, 올레길과 풀숲에서 피어오르는 봄의 입자들이 마스크를 뚫고 내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얼래고 달래고 안아주었었다.
그렇게 무사히 코로나도 한번 걸리지 않고, 새로운 곳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게 전부 제주 바다, 올레길 그리고 친구 덕이었다. 아내 덕이었다.
그렇게 나는 요리처럼 잘 나온 안주덕에, 오랜만에 친구와 기울인 술잔덕에 처음으로 그 행복했던 추억에 내가 주었던 치유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둑했던 우리 자리가 갑자기 알록달록한 폭죽이 터지듯 환해졌다. 하천변 데크 위로 별이 무수히 떨어져 내렸다. 지금껏 들리지도 않던 배경 음악이 들렸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두 분이 다시 가셔요.' 가셔요, 가셔요, 가셔요..... 몽롱한 기분 속에서도, 나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나와 시선이 만난 친구는 알이 가득한 새우머리 튀김을 씹으면서 이미 어깨춤을 추는 듯했다.
다음 날. 친구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비행기와 숙소 예약은 이미 끝냈으니 렌터카만 예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원래 그런 속도로 일상을 살지 않는 친구가.
어느날 아내가 가족톡방에 올려줬던 영상 하나가 떠오른다. 짧은 영상속에서 중년으로 보이는 주인공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어릴때는 이십대는 왜 친구가 많이 필요한 지 알아?. 약하니까, 의지할곳이 없으니까. 나이들면 왜 친구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줄 알아?. 맞춰주지 싫어서!'
진짜 친구는 이래도 저래도 이미 맞춰진 상태다. 새삼스럽게 맞출 필요가 없는 게 친구다. 아무때 어떤 사태에서나 맞출 게 없어지고 남은 친구가 진짜 친구다. 살아야 할 핑계를 늘 만들어 주는 맛있고 귀한 음식같은.
앞으로 2주 뒤. 금토일. 친구와의 생애 두 번째 제주도 여행. 부드러운 새로, 아니 바람과 따뜻한 사케, 아니 햇살 아래, 우리의 우정은 아내들의 우정만큼 진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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