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커피잔에서 만난 루크레티우스

[ 새벽독서; 나를 춤추게 하는 문장2 ] 11

by 정원에

스티븐 그린블랫의 <1417년, 근대의 탄생>(이하 1417년)을 다시 읽으면서 원제가 ‘비껴가는 입자; 세계는 어떻게 근대가 되었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 봅니다.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다 갑자기 떠오른 장면이 하나 있었거든요. <1417년>은 이 원제의 한국어판이 되는 셈입니다.


Chapter1. 커피 잔 속의 우주

친구 내외와 교외 카페에 갔을 때에요. 아내가 메뉴판을 보더니 ‘그 커피’가 있다면서 알려주더군요. 몇 년 전 강릉에 갔을 때 카페 창밖으로 부서지는 파도의 힘을 빌어 눈을 질끈 감고 마셔봤던 그 커피였죠.

원두가 비싸 팔면 팔수록 손해라고 하던 게이샤였습니다. 넷이서 두 잔은 게이샤를 시켰지요. 일반 머그컵에 나온 커피와는 다르게 황금색 잔과 받침 세트에 담긴 커피를 맛보았습니다.

그때 저 혼자 물끄러미 황금색 손잡이를 한참 들여다봤던 게 기억이 다시 떠오릅니다.


손잡이 부분이 반질해져서 황금색이 안쪽으로 벗겨져 있었거든요. ‘입자’들이 흩어져 날아가 버린 것이죠.

이 이야기를 처음 한 철학자가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오마주, 에피쿠로스입니다.


약 2400년 전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윤리 시간에 잠깐 배운 쾌락주의자, 정원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의 대장이죠.


그런데 그는 쾌락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입자들로 구성된 세상’이라고 규정하면서 신을 부정합니다. 그 근거로 원자론을 내세우면서 말이죠.


그리고 약 250년 뒤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에피쿠로스의 생각을 자신의 저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전하죠. 저는 지난겨울이 시작될 무렵부터 <1417년>을 읽은 후 지금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는 중입니다.


그런데 어려워요. 그래도 꾸역꾸역 읽다 보니 두 철학자들이 남긴 문장들 중 제 기록 속에, 머릿속에 남게 되는 잔상이 몇 개 정도가 있습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우리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_(p.11) 라면서 죽음의 두려움과 결별하라고 다그칩니다. 죽음은 끝인 것이고, 죽기 전에는 살아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인생을 즐기지 못하게 만드는 죽음에 대한 공포야말로 진정한 비극이라고요.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보내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후세계는 없다'_(p.242)고 강조하죠. 그런데 저는 이 대목에서 솔직히 소름이었어요.


왜냐하면 이 말속에서 루크레티우스는 영혼이 육신과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육신을 구성하는 물질과 동일한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육신이 죽으면 포도주 향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듯 영혼도 소멸해 버린다는 했거든요.


개인적으로 평소에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끝’이다라는 저의 생각을 아주 명쾌하게 뒷받침해 주는 듯한 이야기였거든요. 물론 이 말속에 깊게 심겨 있는 메시지는 종교적 위안을 거부하고 삶 자체에 집중하라는 철학적 요청이겠지만요.


이 철학적 요청에서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에피쿠로스의 핵심 철학인 ‘쾌락’이 등장합니다. '쾌락이라는 밭을 일구어야 한다.'_(p.103)고 하면서 말입니다. 죽음을 피하려는 허망한 시도를 하느라 시간 낭비, 돈 낭비, 정신 낭비, 영혼 낭비 하지 말고 삶을 긍정하고 쾌락을 추구하라고 강조하죠. 놀랍도록 ‘근대적’인 에피쿠로스적 철학의 핵심이면서, 비난의 핵심 대상이 되기도 하죠.



Chapter2. 입자, 자유를 얻다

그럼,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하거든요. 그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_(p.233)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습니다.


모든 것은 원자와 진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말의 의미가 바로 신이 나 영혼, 창조자, 설계자 같은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주는 인간을 위해서 혹은 인간을 중시므로 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_(p.238). 루크레티우스의 무신론적 관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문장이죠.

그러면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우주의 질서와 무질서가 신성한 계획의 산물도 아니고, 신의 섭리도 아니라 모든 사물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은 파괴되지 않고 영원히 ‘입자’들로 존재한다는 의미이죠. 그리고 이 입자들은 끊임없이 결합하고 분해하며 재분배되는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죠.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적 세계관입니다.


이 대목에서 루크레티우스가 declinatio(데클리나티오-미끄러짐), inclinatio(인클리나티오-기울임), clinamen(클리나멘-경사 움직임)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 개념, 즉 일탈을 이야기합니다. '사물은 일탈(逸脫, swerve)의 결과로 태어난다.'_(p.236)고 하면서 말이죠.

사실, 처음 읽을 때는 이 부분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어요. 특히, '일탈은 자유 의지의 원천이다.'_(p.237) 문장이 그랬죠. 그런데 다음 문장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지금은 조금 이해가 갑니다.


'강들은 풍성한 물줄기를 흘려보내 한없는 바다를 계속 채우고, 모든 것을 감싸안는 태양의 햇살로 덮여진 대지는 제 새끼를 다시 낳으니 동물의 일족들이 일어나 번성하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천상의 빛들도 생명을 얻는다.'_(p.237)

바로, 일탈은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을 의미해요. 이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은) 연쇄작용을 촉발시키고, 이로 인해 끝없는 결합과 재결합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 결과로 바로 위 문장과 같은 우리 주변 모든 사물, 즉 인간이나 동물이나 할 것 없이 지각 있는 모든 생명체의 삶은 정해진 운명을 따르지 않고 '자유 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는 거란 생각이 듭니다.



Chapter3. 기도하듯 읽고, 쾌락으로 산다

<1417년>은 왜 1417년일까요? 그린블랫이 책 속에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교황청의 비서이자 인문주의자인 포조 브라촐리니라는 인물이 독일의 한 '수도원' 서가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이 본성에 관하여>를 발견한 해가 1417년이었던 겁니다.


그 당시의 수도원은 실질적으로 '책에 관심을 가진 유일한 기관'_(p.34)이었고, 모든 수도사들은 '글을 읽을 줄 알아야'_(p.35) 한다는 수도원 회칙이 존재했다네요. 수도사들의 일과에 육체노동과 함께 '기도와 같은 독서'_(p.36)를 일과에 정해두었답니다.


수도원에서 일과로 기도와 같은 독서를 하는 동안 상급 수도사 한 두 명이 반드시 수도원을 순찰해야 했데요. '지나치게 아케디오수스(acediosus)하여 시간을 낭비하거나 독서를 게을리하고 한가한 잡담에 빠져 있는 형제가 없는지를 살피'_(p.49)는 게 임무였기 때문이죠.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하나. '아케디오스'를 수도원 사회에서는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_(p.37)했다는데요, 그 의미는 때때로 '무기력한'으로 번역되기도 한다네요. 참 다행입니다. 무기력이란 질병에 걸리지도, 기도와 같은 독서 일과를 게을리하지도 않았던 한 수도사, 포조 덕분에 천년 넘게 잊혔던 너무나도 '근대적'인 사상이 재발견된 것이니까요.

<1417년>은 그 재발견 과정을 그린블랫이 추적한 기록인 것이죠. 중세 시대에 교황청에 속해 있던 포조가 근대를 연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게 좀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당연하겠지만 1417년 당시 사회는 개인의 독립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겠죠. 오히려, 종교의 위안 아래에서 길드, 친족, 가족과 같은 집단적 소속감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했을 겁니다.


너무 성급한 결론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약 800여 년 전에 비하면 지금은 ’나‘를 중심에 두고 살면, 아니 살아도 되는 세상이 된 건 분명합니다. 바로 여기서 오랫동안 오해를 낳았던 쾌락주의가 등장하는 게 아닐까요?


에피쿠로스는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욕망을 채우는 행위는 물론이고, 재산을 모으고 명성과 명예를 얻는 일도 별 의미가 없다는 봤어요. 그런 것들이 주는 쾌락은 짧고 고통은 길기 때문이라면서요. 왜냐하면 인생의 모든 고통과 공포는 전혀 근거 없는 공상, 환상, 미신에서 비롯되기 때문인 것이죠.



오늘의 <정원에> Y

루크레티우스는 말해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입자 운동의 원리를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인간에게 주어진 이 유한한 세계에서 '큰 욕심 없이' 일상의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평정심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요. 큰 욕심이 곧 욕망이잖아요. 바로 욕망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에피쿠로스의 말을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전합니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_(p.244)이라고요. 윤리적 삶의 기준이 신이 나 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큰 욕심 없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빌려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이왕이면 행복하게 채우기 위해 어떤 횃불을 따라가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서로에게서 빌린 것이다. 인간은 주자처럼 삶의 횃불을 따라가는 것이다.'_(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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