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윌슨

[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 28

by 정원에

이른 아침 휑한 주차장. 차에서 내리자마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도 모르게 콧속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훅 들이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텅 빈 운동장을 아이들 대신 밤새 가득 채웠던 냉기가 햇살을 따라 통통 튀어 올랐다. 초록색 인조잔디를 옅은 투명한 냉기가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릴 듯이 얇은 천처럼 덮여 있다.



축구 골대 뒤쪽에서 내 발 앞쪽 정도까지는 아침 햇살이 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새벽 냉기를 가운데 안쪽으로 다 걷어 놓은 듯했다. 나는 여름과 가을의 경계를 밟고 서 있었다. 일부러 냉기가 덮인 부분만 꾹꾹 눌러 밟으며 걸었다. 마치 맨발로 폭신한 여러 겹의 담요를 밟는 것 같았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눈길을 내가 제일 먼저 밟으며 약수터로 향하는 지도를 두 발로 그리는 것처럼 뒤를 돌아보고 한번 더 돌아봤다. 요리조리 찍힌 내 발자국이 내 뒤에서 연신 '브이, 브이'하는 듯 실룩거렸다.


그러다 축구 골대 앞에서 멈칫했다. 새벽 냉기보다 더 진한 새하얀 그물망 뒤에 알록달록한 배구공 하나가 있었다. 거기서 밤을 지낸 모양이었는데, 왠지 아이들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듯 했다. 그 순간, 느닷없이 아주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매일 그 길을 걸으면서 그 생각만 했던 것처럼, 아주 갑자기.


비행기가 바닷가 백사장에 비상 착륙한다. 납치범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조종사가 목숨을 걸고 승객들을 살려내기 위해서였다. 옆구리에 생긴 구멍으로 연기가 새어 나온다. 그 연기와 함께 주인공이 기어 나오다시피 백사장으로 굴러 떨어진다. 영화 <케스트 어웨이>의 시작 장면이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너무나 바쁘게 살던 직장인이 출장 중 갑자기 '무인도'에 떨어진 이후 4년이란 시간이 흘러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는 이야기다.


실제 무인도에 혼자 갇힌 영화 속 주인공은 윌슨이라고 이름 붙인 배구공을 친구로 삼는다. 말을 걸고, 스스로 대답을 하고, 화를 내고, 사과를 하고. 무인도 탈출을 시도할 때도 유일하게 챙겨간 게 배구공 친구 윌슨이다.


아마도 삼십 대 후반 언저리였을 거다. 시기는 정확하게 기억나질 않는데 <케스트 어웨이>를 보면서 자연스레 떠올랐던 그때의 상상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기억이 아침 출근길, 덩그러니 혼자 있던 배구공으로 다시 떠올랐다.


'나는 어떤 무인도에 갇혀 있는 걸까. 그 무인도에서 나에게 윌슨은 무엇일까'하고. 물론 그때는 스스로의 상상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던 것 같다.


번잡한 속도전을 멈추고 스스로 선택한 고독의 희열을 만끽하려 한다. 나를 기만하는 열정뒤에 숨는 대신 외부의 방해 없이 내면을 탐구하는 시공간을 찾고 또 찾는다. 피어오르는 생각을 멈추어 굴리는 놀이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새로운 내가 탄생하는 순간, 순간을 메모하고, 찍어두는 놀이에 푹 빠져 있다. 나로 나에게 말을 걸고 대답을 기다리는 놀이에 신이 난다. 운전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걸으면서도, 잠 속에서도. 그 대답이 들리면 언제이든, 어디서 곤 멈추어 메모하고, 찍는다. 그런 나를 내가 내려다본다. 그때 나는 고개 들어 나에게 미소 짓는다.


'온기'가 느껴진다. 사라졌던 나의 '감각들'이 되살아 난다. 그때만큼은 먹을 것, 마실 것, 볼 것, 놀 것이 넘쳐 나는 나만의 '무인도'가 생긴다. 그 안에만 서면 기록한 글자의, 글의 목소리가 나를 통과해 나에게만 들린다. 잘 들리지 않으면 조금 더 기다리는 것도 좋다. 너무 좋다. 나를 즐겁게 한다.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되니까.


껍질이 잘 안 까지는 땅콩 한 알에 오기 부리지 않는다, 그때처럼. 땅콩 한 알에 내 마음을 몽땅 빼앗기지 않는데, 지금은. 다른 땅콩 한 알을 집어 까보면 된다는 것을 안다, 이제는. 40대 내내 잊고 살았던 그 답이 요즘에 와서야 조금씩 보인다.



난 결코 무인도에서 벗어나려는 게 아니었다. 나만의 무인도를 갖고 싶었던 거였다. 나만의 '무인도'를 찾아 헤매고 있었던 거다. 이제야 내가 나에게 와닿았다. 닻을 내린 채, 비로소 표류하던 망망대해에서 '무인도'로 뛰어내렸다. 매일매일, 땅콩 한 알, 한 알 까먹으며 잘 놀기만 하면 된다,




https://blog.naver.com/ji_dam_

@브런치북 [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로 7월 28일부터 30일 연속 글쓰기 중입니다. 30일 뒤에 한 권의 초고를 완성하려는 도전입니다. 그러는 동안 기존 라이팅 레시피는 잠시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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