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상의 빛을 보기 전, '나'에게는 태명(胎名)이라는 가장 따뜻한 이름이 있었다.
‘아지’, ‘튼튼이’, ‘사랑이’, ‘돼지’... 이때의 이름은 사회적 약속이나 역할이 아니라 그저 “네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초보 부모의 콧노래이자, 순수한 환대의 호명이었다.
이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꿈틀거리는 발차기 만으로도 사랑받는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러다 태어나면서 주민등록상의 ‘진짜 이름’이, 지금의 이름이 부여되었다. 이것은 세상이라는 학교에 입학하며 가슴에 다는 ‘명찰’과 같다. 순수한 환대가 부모의 기대와 염원으로 옮겨가는 순간이다.
'나'는 이 명찰을 달고 사회의 일원이 된다. 이때부터 그냥 존재하는 '나'에서 누군가에게 불리는 '나'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 이름 석 자는 점차 흐릿해지고, 그 위에 ‘역할’이라는 두꺼운 외투들이 겹겹이 쌓인다. 학생, 선생, 대리, 팀장, 사장, 혹은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빠...
이 시기에는 내가 누구인가 보다 내가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해진다. 우리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 역할이라는 갑옷을 입고 치열하게 싸운다. 때로는 그 갑옷이 너무 무거워 내 진짜 살결이 짓눌리기도 한다.
은퇴를 하거나, 아이들이 다 자라거나, 혹은 인생의 큰 파도를 넘고 나면 '나'는 비로소 입고 있던 무거운 외투들을 하나둘 벗게 된다. 자의로 그리고 강제로!
‘김 부장’도 아니고 ‘누구 엄마’도 아닌, 주민등록증에 적혀 있던 그 낯설고도 익숙한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때의 이름은 태어날 때 받은 빳빳한 명찰과는 다르다.
낡고 긁혔지만, 비로소 남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의 눈으로 '나'를 마주하는 이름이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지.” 우리는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로서의 '나'를 다시 부르게 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챕터, 혹은 깨달음의 순간에 '나'는 언어의 마법 같은 진실을 마주한다. '나'라는 사람(Name)이 겪은 모든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는 결국 ‘진정한 나’라는 목적지에 가 닿기(이르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처음 이름(Name)은
나를 ‘부르는 소리’였지만,
마지막 이름(Arrival)은
내가 ‘완성된 또는 완료된 상태’를 뜻한다.
'나'로 산다는 것은, 태명이라는 씨앗에서 시작해 역할이라는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나, 결국 나만의 고유한 열매를 맺는 곳에 ‘이름(Arriving)’이다.
인생이란
‘이름(名)’이라는 지도를 들고 떠나, 온갖 길을 헤매다, 마침내 나라는 본질에 ‘이름(至)’의 여행이다.
지금 역할의 무게에 눌려 힘들다면, 통증에 밤새 진통제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목적지에 부지런히 ‘이르고’ 있는 중이기 때문일 거다.
‘나’의 이름은 명사가 아니라, 지금도 원래도 동사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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