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색 달개비(1)

[ 픽션, 이야기속으로 ] 1

by 정원에


창고형 할인 매장 <다있네> 달개비 지점의 공기는 늘 건조하고 서늘했다. 대형 에어컨이 뿜어내는 기계적인 냉기는 사람들의 활기를 앗아가는 대신, 물건들의 유통기한을 연장하는 데에만 충실했다.


연수는 계산대 근처의 매대에 몸을 숨긴 채, 십 분 넘게 한 여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잘못 배치해둔 가냘픈 유리 조형물 같았다.


그녀의 피부는 비정상적일 만큼 희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그 하얀 살결은 생기가 돌기보다는 반투명한 종이처럼 위태로워 보였고, 그 위로 검은색 작업 장갑을 낀 손이 유독 이질적으로 도드라졌다. 그 손은 마치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는 듯 검은 어둠 속에 숨어 있었지만, 정작 그녀가 안내하는 셀프 계산대의 은빛 기계들과 부딪칠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그녀는 허리를 온전히 펴지 못했다. 목에 보이지 않는 무거운 추라도 매달아 앞으로 늘어 뜨린 듯, 그녀의 상체는 완만하게 굽어 있었다. 통증은 그녀의 척추를 타고 올라와 미간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고 사라지곤 했다. 비어 있는 셀프 계산대가 생길 때마다 그녀는 손님들을 향해 기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그것은 입술 끝만 간신히 들어 올린 '의지의 산물'일 뿐 감정의 발현은 아니었다.


자주 흘러내리는 안경을 치켜올리는 그녀의 손짓에는 자꾸만 힘이 빠졌다. 그 동작은 단순히 시력을 교정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꾸만 흐릿해지는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저항처럼 느껴졌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깊은 늪 같았다. 누군가 던진 무심한 말 한마디나, 카트가 부딪히는 소음들이 그 늪 속으로 속절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것을 연수는 보았다.


“다음 손님, 3번 계산대 이용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진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 같았다. 연수는 문득 그녀의 검은 장갑 속을 상상했다. 그 안에는 어쩌면 굳은살 대신 짓무른 상처가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삶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어버린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보호하기 위한 그녀만의 마지막 방어벽일지도. 그녀의 구부정한 허리는 타인의 편의를 위해 스스로를 굽히는 법을 배운 이의 훈장 같기도 했고,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비명을 지르는 몸의 정직한 고백 같기도 했다.


연수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 한 병을 건네고 싶었지만,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와 연수 사이에는 계산대라는 물리적인 거리보다 더 깊은, ‘삶의 무게’라는 골이 패어 있었다. 그녀가 겪고 있는 통증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고질적인 육체의 병인지, 아니면 어제 누군가에게 받은 마음의 타박상인지. 하지만 그녀의 하얀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는 인내의 빛은, 적어도 그녀가 그 통증에 지배당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힘이 실린 손길이었다. 그녀의 굽은 등 위로 매장의 조명이 길게 부서져 내렸다. 연수는 그녀의 고통이 끝나는 순간을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녀가 다음 손님을 향해 다시 한 번 입매를 가다듬는 찰나를 목격했다. 그것은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작은 투쟁이었다. 그녀는 아픈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그 아픔을 딛고 서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연수는 카트에 담긴 물건들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우리의 삶도 저 검은 장갑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무언가와 충돌하며 닳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장갑을 벗었을 때 드러날 그녀의 하얀 손은, 분명 지금보다 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매장을 나서는 길, 등 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그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공기를 갈랐다.


무거운 추를 매단 채로도 그녀는 한 발자국을 더 내딛고 있었다. 창밖에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고, 그 빛은 <다있네>의 무채색 간판을 묘하게 따스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긴 하루도 조금은 따뜻하게 저물기를, 그리고 내일 아침엔 그녀의 허리가 오늘보다 조금은 더 펴져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연수의 발끝에 머물렀다.


문득 돌아본 매장 안, 그녀의 검은 장갑이 주황빛 노을을 머금고 반짝였다. 그것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니라, 빛을 흡수해 내일을 준비하는 하나의 작은 프리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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