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픽션, 이야기속으로 ] 2
연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아픈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부서지고 있었다. 싸구려 플라스틱 물건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가장 귀하고 약한 것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연수는 줍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그녀의 검은 손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연수를 향했다. 안경 너머가 아닌, 맨눈으로 마주친 그녀의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죽음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달개비라는 지점 이름처럼, 그녀는 오늘 하루를 피워내고 나면 내일은 없을 것 같은 위태로운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저기요.” 연수가 손을 뻗자, 그녀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마치 자신의 고통이 전염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산대에 쿵, 하고 그녀의 등이 부딪쳤다. 선반 위에 진열되어 있던 껌과 사탕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알록달록한 사탕들이 검은 장갑 위로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쏟아진 사탕들은 바닥을 구르며 경쾌한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는 계산대 앞의 침묵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주변의 시선이 화살처럼 그녀에게 꽂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히려다,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의 뇌는 ‘치워야 한다’고 명령했으나, 척추는 ‘움직이면 부러진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 모순된 명령 사이에서 그녀의 육체는 정지했다. 연수는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안경을 먼저 집어 들었다.
도수가 높은 렌즈 너머로 바닥의 타일 무늬가 어지럽게 굴절되어 보였다. 이것은 그녀가 견뎌온 세상의 굴절률이었다. 멀쩡한 사물을 비틀어서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세상. “놔두세요. 제가 줍겠습니다.” 목소리는 단호했다. 연수는 쭈그리고 앉아 알록달록한 사탕들을 주워 담았다. 그녀의 검은 장갑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떨렸다. 연수가 일어서서 안경과 사탕 바구니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맨눈의 그녀는 발가벗겨진 듯 초라했다. 눈가에는 식은땀이 맺혀 화장이 번져 있었다. 그녀는 급히 안경을 받아 썼다. 안경다리가 귀 뒤로 넘어가는 순간, 연수는 보았다. 흘러내린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목을. 검은 장갑은 손목 위까지 덮여 있었지만, 그 위로 살색 파스가 칭칭 감겨 있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파스가 아니었다. 살이 보이지 않을 만큼 겹겹이 붙인 테이핑은, 마치 금이 간 도자기를 억지로 붙여놓은 접착제 같았다.
그녀는 뼈와 근육으로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오직 저 끈적한 지지대에 의존해 위태롭게 직립해 있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웅얼거렸다. 그 사과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연수에게 한 말인지, 소란을 피워 미안한 매장 관리자에게 한 말인지, 아니면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몸뚱어리에게 하는 말인지.
그때, 매장 안쪽에서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검은 장갑 낀 손이 계산대 모서리를 하얗게 질리도록 꽉 움켜쥐었다. 고통보다 더 큰 공포가 그녀를 지배했다.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공포. 내일 당장 이 붉은 유니폼을 입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존의 불안이 등뼈의 통증을 마비시켰다. 그녀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연수가 처음 봤던 그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다시 얼굴에 가면처럼 씌워졌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고객님.”
그녀는 연수 손에 들린 물건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바코드 스캐너가 삑, 소리를 냈다. 그녀는 아픔을 참기 위해 숨을 멈췄다. 물건을 옮기는 팔의 동작은 로봇처럼 딱딱했다. 관절이 움직일 때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삐걱거리는 파열음이 들리는 듯했다. 연수는 그녀가 필사적으로 연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쓸모 있다’, ‘나는 고장 나지 않았다’는 연극. 그 처절한 무대 위에서 연수는 유일한 관객이자 공모자가 되었다.
연수는 아무 말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그녀의 검은 장갑과 연수의 손가락이 스쳤다. 차가울 것이라 예상했던 장갑은 축축하고 뜨거웠다. 그것은 식은땀과 열기가 뒤섞인, 늪 같은 질감이었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연수는 고개를 저었다. 영수증은 필요 없었다. 이 순간의 기억은 종이 쪼가리보다 더 선명하게 연수의 망막에 각인되었으므로.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길, 연수는 자동문 앞에서 멈춰 섰다.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뒤로, 다시 계산대에 위태롭게 기댄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연수는 <다있네> ‘달개비 지점’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흔한 잡초 같은 달개비가 아니었다. 이곳은 화려한 무늬를 가진 관상용 ‘삼색 달개비’의 밭이었다. 삼색 달개비의 잎은 기묘하다. 앞면은 녹색과 흰색, 분홍색 줄무늬가 어우러져 화사하게 빛나지만, 잎을 뒤집으면 그 뒷면은 온통 짙은 자주색이다. 마치 피멍이 든 것처럼 검붉고 어두운 보라색.
그녀는 정확히 삼색 달개비였다. 손님을 향해 보여주는 하얀 얼굴과 억지로 끌어올린 미소, 다림질된 유니폼은 세상에 내보이는 화려한 앞면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검은 장갑으로 가린 손, 테이핑으로 칭칭 감아 버티는 척추, 비명조차 삼켜야 하는 짙은 자줏빛 고통이 뒷면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앞면의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는 뒷면의 어둠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었다.
문득, 주머니 속에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아까 그녀가 떨어뜨렸던 사탕이었다. 연수는 사탕을 꽉 쥐었다. 딱딱한 포장지가 손바닥을 찔렀다. 그 순간, 유리문에 비친 얼굴이 낯설게 일그러졌다. 연수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오늘 아침, 연수는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알겠습니다”라며 웃었다. 점심시간에는 동료들의 험담에 맞장구치며 괜찮은 척 밥을 넘겼다. 속이 문드러지고, 자존심이 멍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완벽하게 숨겼다. 연수 또한 말끔한 정장이라는 앞면을 전시하며, 속으로는 짓무른 자줏빛 뒷면을 감추고 사는 또 하나의 삼색 달개비였다.
그녀의 검은 장갑은 단순한 보호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들키지 않기 위해 두르고 있는 수많은 방어기제의 실체였다. 연수는 그녀가 안경을 추어올리는 그 손끝에서, 매일 밤 화장실 거울을 보며 한숨 쉬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계산대에 몸을 기대듯, 연수 역시 무언가에 기대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안고 있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