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색 달개비(3)

[ 픽션, 이야기속으로 ] 3

by 정원에

지난 이야기


우리는 서로의 뒷면을 알아보았다. 아까 계산대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흠칫 놀랐던 건 단순히 실수를 들켜서가 아니었다. 연수의 눈동자 속에 비친, 그녀와 똑같은 색깔의 피로와 고독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그것은 따뜻한 위로가 아니었다. 너도 나처럼 아프구나, 너도 나처럼 견디고 있구나 하는 서늘하고도 묵직한 확인 사살이었다.


연수는 자동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찼다. 그녀는 내일도 저곳에 있을 것이다. 앞면의 화려한 무늬를 잃지 않기 위해, 뒷면의 자줏빛 멍을 더욱 짙게 물들이며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수 역시, 내일 아침이면 다시 웃는 얼굴로 출근할 것이다. 연수는 잠깐 망설이다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혀끝에 닿는 맛은 달콤했지만, 목으로 넘길 때는 씁쓸했다. 그것은 우리가 삼켜야 하는 하루의 맛이었다.


연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불 꺼진 거리의 쇼윈도마다, 버스 정류장의 유리창마다, 수많은 삼색 달개비들이 저마다의 자주색 뒷면을 숨긴 채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그렇게, 앞면만 보여주며 시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밤은 만물의 색을 지우고 오직 실루엣만을 남긴다. 입안에서 굴러다니던 사탕이 다 녹아 사라질 즈음, 연수는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낡은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가로등 불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손등 위로 푸르스름한 정맥이 비쳤다. 저 정맥은 피부라는 얇은 막에 갇혀 있지만, 사실은 온몸을 휘도는 뜨거운 생명의 길이다. 계산대 그녀의 손목을 칭칭 감고 있던 파스처럼, 연수를 지탱하던 정장 재킷도 실은 자신의 비명을 그럴싸하게 가두는 외피에 불과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소음과 네온사인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들이, 눈을 가늘게 뜨자 하나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별들도 사실은 폭발하고 충돌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는 고통의 산물이다. 하지만 수만 광년 떨어진 이곳에서 보는 별빛은 그저 고요하고 아름답다. 우리네 삶도 타인에게는 그저 멀리서 반짝이는 점 하나로 보이겠지만, 그 점 안에는 각자의 우주가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연수는 오늘 그 검은 장갑을 통해 배웠다.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내일 아침 일찍 보고서를 수정해두라는 상사의 무미건조한 메시지였다. 평소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자책의 늪으로 빠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 문자가 우주의 먼지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연수는 답장을 보내는 대신, 잠시 화면을 꺼두었다. 그리고 자기안의 자줏빛 멍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숨기고 싶었던 그 어둠이, 사실은 ‘나’라는 존재를 가장 정직하게 증명하는 빛깔이었음을 인정하자 가슴 한구석에 작은 틈이 생겼다.


다음 날 퇴근길, 발길은 다시 <다있네>로 향했다. 매장 안은 여전히 분주했고, 바코드 찍는 소리는 기계적인 심박수처럼 일정했다. 계산대에는 어제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여전히 안경은 미끄러졌고, 등은 구부정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의 검은 장갑이 괴사의 흔적이 아닌,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여 지켜내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처럼 보였다.


차례가 되었다. 연수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물건을 건네받으며 찰나의 순간 연쑤를 알아본 듯했다. 어제 우리가 나누었던 그 서늘한 공범 의식은 오늘, 기묘한 연대감으로 치환되어 있었다. 연수는 가방 안에서 미리 준비한 물건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계산대 위에 놓았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었다. 하얀색 면장갑 한 켤레와 그 사이에 끼워 넣은 작은 메모지였다. ‘뒷면이 자줏빛이어도,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운 달개비입니다. 잠시라도 장갑을 벗고 숨 쉬는 밤이 있기를.’


그녀의 손이 멈췄다. 검은 장갑 낀 손가락 끝이 하얀 면장갑의 부드러운 감촉 위에서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수를 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에 고여 있던 짙은 그늘 사이로, 아주 가느다란 파도가 일렁였다. 그녀는 소리 내어 울지도, 환하게 웃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우리가 각자의 궤도에서 성실히 공전하고 있다는, 살아있음에 대한 상호 간의 수신호였다.


매장을 나오자 일주일 내내 이어진 한파의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쳤지만, 더 이상 시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보도블록 위에 연수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 그림자 또한 자줏빛 밤과 닮아 있었다. 연수는 이제 안다. 감추려 애썼던 뒷면의 어둠이 실은 타인의 아픔을 알아보는 렌즈가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각자의 우주에서 부서지고 폭발하며 살아가는 별들이고, 그 파편들이 모여 서로를 비추는 은하수가 된다는 것을.


내일도 연수는 꽉 끼는 구두를 신고 출근할 것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화려한 앞면을 연기하며 피곤한 하루를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정장 주머니 속에는 그녀가 떨어뜨렸던 사탕의 껍질이 부스럭거리고,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에게 건넨 하얀 장갑의 온기가 남아있으니까. 길가 화단에 고개를 숙인 채 잠든 삼색 달개비를 보며 연수는 속삭였다. “내일 또 보자.”


사는 게 결말은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서로의 뒷면을 외면하지 않는 한, 이 도시는 조금 더 따뜻한 자줏빛으로 물들 것이다. 연수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어둠 속을 향해 힘차게 내디뎠다. 자신만의 궤도를 따라, 새로운 내일을 발견하기 위하여.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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