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픽션, 이야기속으로 ] 14
남편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보면, 세상은 늘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흘러간다. 액셀을 밟고 핸들을 꺾는 그의 옆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내가 가지지 못한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그가 쥐고 있다는 사실은, 때로 우리 사이의 미묘한 기울기를 만든다. 그 기울기가 나를 불편하게 할 때면 나는 언덕 위 그 성당을 찾자고 말한다.
성당은 늘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다. 마치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침묵처럼. 나는 운전을 못 하기에 그곳에 닿으려면 반드시 그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의 인내가 필요하다. 그는 불평 없이 나를 데려다주지만, 성당 입구에 서면 우리는 서로 다른 섬이 된다. 그는 차 안이나 입구의 벤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나는 홀로 그 정적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간다.
성당 내부의 공기는 바깥보다 서늘하고 무겁다. 나는 신자가 아니다. 고해성사를 하는 법도, 성호를 긋는 정교한 순서도 모른다. 그저 그곳에 놓인 나무 의자의 질감과, 높은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의 부스러기들이 내 어깨에 내려앉는 감각을 사랑할 뿐이다. 나는 딱딱한 장궤틀에 무릎을 꿇는다. 무릎에 전해지는 통증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정직한 신호다. 두 손을 모으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문장은 없다. 기도는 언어가 아니라, 내 안의 소란을 잠재우는 일임을 그곳에 앉아 10분, 20분 시간을 보내며 배운다.
성당을 빙 둘러싸고 있는 ‘십자가의 길’ 12장면. 그 조각상들은 한 사람의 생애가 어떻게 부서지고 다시 세워지는지를 보여주는 파노라마 같다. 나는 마지막 장면 앞에 멈춰 선다. 죽음과 슬픔, 그리고 알 수 없는 내세가 뒤섞인 그 차가운 돌의 형상.
그때였다. 내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것은 남편에게 의존하며 살아야만 하는 나의 무력감일 수도 있고, 서로를 다 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각자의 심연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우리 관계의 복선일 수도 있었다. 조각상 위의 먼지 한 톨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을 10분 넘게 응시하다 보니, 그 돌덩이가 마치 내 모습처럼 보였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서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하지만 그 안에는 누구보다 뜨거운 숨을 숨기고 있는 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눈물은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받고 싶다는 욕구와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이 만나 일으킨 스파크였다. 동시에, 내가 운전대를 잡지 못해도 나의 삶은 여전히 나만의 궤적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는 안도감이기도 했다. 나는 신이 없다고 믿지만, 이 순간만큼은 내 안의 이름 없는 신에게 나를 맡기고 싶었다.
성당 밖으로 나오자 남편이 서 있다. 그는 내가 왜 울었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내 눈가의 붉은 기운을 보고는 조용히 차 문을 열어줄 뿐이다. 그 침묵은 방금 전 성당에서 마주했던 침묵과 닮아 있다.
우리는 다시 언덕을 내려간다. 내가 운전하지 않아도 차는 나아가고,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삶은 계속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멈춰 서서 흘린 그 눈물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연료가 되었음을. 내일은 어쩌면 내가 그에게 운전을 가르쳐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혹은, 이 굽이진 길을 함께 걷자고 제안할지도 모르겠다.
성당의 종소리가 멀어지는 뒤편으로, 아직 가보지 않은 길들이 희뿌연 안개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 불확실성조차 하나의 빛으로 다가온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