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이야기
아버지는 숨을 쌕쌕 내쉬며 단잠에 들었다.
동생은 아버지의 기저귀가 젖지 않았는지 틈틈이 체크를 한다. 20대 후반부터 아버지 간병을 도맡았던 동생은 어느덧 마흔의 나이가 되었다. 결혼할 여력이 없었다. 결혼도 직업도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마다 기준은 아버지였다.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건 그런 거였다.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처럼, 부모의 생을 책임지기 위해서 자녀 역시 자신의 생을 걸어야 한다.
아버지는 스스로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집을 나간 아내는 몇 개월 후 이혼서류를 들이밀었다. 외상값을 하도 떼여 감당할 수 없는 빚에 휘청이다 60대 후반에 파산을 했다. 자식들에게 몇 년에 걸쳐야 갚을 수 있는 빚을 물려줬다. 일을 그만두고 난 후 매일 누런 메리야스 차림이었다. 유일한 벗은 텔레비전 채널 몇 개뿐. 설상가상, 불청객 치매가 찾아왔다.
“당신이 뭔데 우리 집에 와서 시끄럽게 떠들어?”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과 대꾸 없는 싸움을 하는 통에 텔레비전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매일 다니던 길 위에서 오도 가도 못했다. 집, 가족, 자신에 대한 기억마저 비쩍 말라 갔다.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던 아버지는 돌연 고집스럽고 폭력적인 행동을 했다. 아버지를 목욕시키는 날엔 딸들은 함께 기도를 했다. 목욕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아버지가 휘두른 주먹에 안경이 우그러지며 한쪽 알이 빠졌다. 오늘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기를. 작은 욕실에 들어올 수 없던 동생은 언니의 안녕을 기도하며 문밖에서 성경을 읽었다.
홀아비는 세 딸을 위해 살아왔다. 새벽녘 일을 마치고 들어와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잠시 눈을 붙이고 아침이 되면 딸들의 도시락을 싸서 학교를 보냈다. 아내가 떠난 빈자리는 집안 곳곳 아무리 애를 써도 태가 많이 났다. 생활이라도 여유가 있었으면. 항상 돈 들어올 곳보다 나갈 곳이 많았다. 빈 지갑은 쿨럭쿨럭해도 어떻게든 자식을 건사하겠다는 다짐은 돌처럼 와 박혔다. 아버지라는 울타리 안, 갈바람에 세 딸은 자랐다.
제 것 다 내어주고 박삭대는 말년의 인생을 기댈 곳은 자식뿐이었다. 첫째 딸은 취업을 위해, 둘째인 나는 결혼을 하며 집을 떠났다. 결혼을 하고 내가 아버지를 모시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아버지 인생은 막내딸 손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버지가 자신의 일기장을 더는 숨기지도 기록하지도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일기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치매 진단을 받은 후 거의 날마다 일기를 썼다. 흩어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한 노력이었다. 치매에 걸려도 생은 이어진다. 남은 생이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그 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볼펜을 잡고 분투했다. 일기에는 인생의 화창한 날보다 비가 내리고 바람 불어대는 날의 기록이 더 많았다. 난 참 지지리 복이 없는 사람이라는 한탄, 가누기 힘들었던 외로움과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다른 대안이 없기에 쥐어짜서 그러모은 희망이 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중 어떻게든 보잘것없는 희망을 품으려 한 점 때문에 아버지는 더 안쓰러워 보였다. 별 볼 일 없는 하루하루, 잊지 않으려는 부모님과 딸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었다. 하지만 매정한 치매는 다 빼앗아갔다. 자신의 이름 석 자만 겨우 붙잡아 두었다. 그마저 잘못 적은 것이 마지막 기록이었다. 아버지의 의지로 남길 수 있는 인생은 끝이 났다. 일기 마지막 장에 막내의 필체가 보였다.
<2019년 11월 24일>
아버지의 일기를 이제야 보게 되었다.
아버지의 서글프고 가난하고 외롭던 인생을 내가 지금이라도 바꿔줘야겠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동생은 잠 못 이루는 아버지와 함께 고단한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터로 나갔다. 아버지를 달래서 동화책 읽기, 숫자세기, 그림 그리기, 운동 등을 같이 하며 손에 쥔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기억을 붙잡으려 했다. 언니들이 돕는다고 했어도 아버지와 함께 부대끼며 일상을 감당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에게 목이 졸렸다. 언제부터는 대소변 처리를 해야 했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모두 깜깜한데 어떻게 너는 그 어둠 속에서 아버지 인생을 바꿔주겠노라 다짐할 수 있었을까.
수척한 동생을 보다 못한 내가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시자고 했다. 동생은 아버지가 떠난 집에서 미안해하고 또 미안해했다. 요양원은 신체가 멀쩡하고 치매가 심한 아버지를 제어하기 위해 약으로 절이듯 했다. 몇 군데 요양원을 옮겼으나 마찬가지였다. 코로나 기간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겨우 마주한 아버지는 비슬비슬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았다. 눈이 멍하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얼마 후 한쪽 몸에 마비가 와 응급실로 실려 갔다.
“언니, 내가 지옥 같아서 아빠를 요양원으로 모셨는데, 이젠 아빠가 지옥에 있는 것 같아.”
동생은 울며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오자고 했다. 우리가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고 막아서는 내게, 동생은 아빠를 다시 요양원으로 보내면 얼마 못 가 아빠는 죽는다고 외쳤다. 동생은 아버지를 집으로 다시 모셔왔다.
“이젠 네 인생도 살아야지. 할 만큼 했잖아.”
“언니, 나는 그게 안돼. 아빠를 빼고 내 인생을 사는 게, 난 안돼.”
말이 어눌해진 아버지가 딸들에게 끝까지 할 수 있었던 말은 ‘밥 먹었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헤아림이다. 자식들 모두 같은 은혜를 입었어도 동생은 자식을 사랑한 아버지의 마음과 그간의 고생을 깊이 헤아렸다. 아버지가 날 20년간 키워줬으니 나도 아버지를 20년간 책임지고 지켜주겠노라고 다짐했다. 아버지가 홀로 견딜 수 없는 시간. 동생은 아버지 곁에서 제게 있는 힘을 다 쏟고 있다. 실패했다고 여긴 아버지 인생의 결말을, 제 손으로 행복하게 바꿔주겠다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동생이 침대에 누운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동생 덕에 아버지는 우는 건 잊었어도 웃는 방법은 잊지 않았다.
*효사랑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을 수정해서 다시 발행했습니다.
*동생이 운영하는 "아빠와 나" 유튜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9IAw2p6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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