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잘못이 나에게 닿지 않는다면 관계는 유지될까
용서와 복수는 인간 감정의 양극에 놓여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때, 우리는 두 갈래 길 앞에 선다. ‘용서할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 그 둘은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 뿌리에서 자란다. 둘 다 상대의 잘못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전제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타인의 잘못이 나에게 어떤 상처도 주지 않는 세상이 된다면 어떨까? 용서할 일도, 복수할 일도 없는 세계. 그곳에서는 인간이 더 평화로워질까, 아니면 관계가 의미를 잃게 될까?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에 상처받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욕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누군가가 나를 속여도 분노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말과 행동을 그 사람의 문제로만 분류한다. 감정은 외부 자극으로부터 완벽히 보호되고,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단단한 벽처럼 존재한다.
표면적으로는 이상적이다. 누구도 타인 때문에 울지 않고, 미움도, 원망도 없다. 관계의 갈등이 사라지자, 세상은 조용해졌다. 서로의 잘못은 더 이상 이슈가 되지 않는다. 모두가 갈등 상황을 무시하며 지나간다.
하지만 그 평화는 차가운 평화다. 감정이 부딪히지 않자, 관계는 점점 투명해졌다. 투명하다는 말은 겉보기에는 깨끗하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용서도 복수도 없는 사회는 결국 서로에게 상처도 남기지 않지만, 서로에 대한 기억도 남기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우리는 보통 용서를 감정의 문제로 여긴다. 누군가의 잘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얼마나 오래 마음에 품으며, 어느 순간 그 감정을 내려놓을지 결정하는 일. 그러나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용서는 단순한 감정적 관용을 넘어,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발명한 아주 섬세한 기술에 가깝다.
기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용서는 인간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오류를 처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는 전제 아래 살아간다. 매일 누군가는 약속을 잘못 기억하고, 누군가는 상대의 말을 오해하고,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의 가슴에 남는다. 잘못된 판단 하나가 관계를 흔들고,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말과 행동이 타인의 신뢰를 조금씩 갉아먹기도 한다. 이런 크고 작은 오류들은 그냥 두면 관계와 공동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오류들을 다루는 방법을 발명해 왔다. 그 두 축이 바로 용서와 복수다.
용서는 오류의 삭제에 가깝다. 완전히 지운다는 뜻이 아니라, 상처를 다른 형태의 기억으로 재저장하는 작업이다. ‘그 일은 있었지만, 이제 나는 그와 함께 살아가겠다.’라는 결론으로 사건을 정리하는 행위다. 복수는 오류의 교정에 가깝다. 폭력적 방식이긴 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당한 고통을 알려 바로잡겠다.’라는 일종의 정의 욕망이 숨어 있다. 둘 다 상처를 대하는 방식, 즉 오류를 처리하는 서로 다른 알고리즘이다.
여기서 한 번 더 상상해 보자. 용서도 없고, 복수도 없는 세계. 타인의 잘못에 대해 분노하지도 않고, 상처받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않고, 용서할 필요도, 복수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언뜻 보면 얼마나 평화로운가. 갈등은 사라지고, 감정적 소요도 없고, 인간은 타인의 실수로 인해 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침묵은 곧 다른 혼란을 불러온다. 바로, 오류가 처리되지 않는 세계라는 문제다. 컴퓨터 시스템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동안 작은 오류들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오류를 즉시 잡아내 수정하는 기능이 없다면 시스템은 결국 과부하에 걸리고 멈추게 된다. 인간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서로의 실수와 결함을 용서와 복수라는 두 축을 통해 어떻게든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구조를 다시 세워왔다. 그런데 둘 중 어느 것도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오류가 정리되지 않고 무한히 축적되어 떠다니는 사회다. 잘못은 실제로 일어나지만, 그 잘못이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상태로 남는다.
용서가 사라진 세계에서 잘못은 더 이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냥 한때 일어난 일일 뿐이며 아무에게도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다. 복수도 사라진 세계에서는 타인의 잘못이 나를 얼마나 괴롭게 했는지 몸소 느끼게 해주겠다는 충동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사상은 인간이 정치적·도덕적 존재가 되기 위해 타인의 행위와 과거의 고통에 침묵하지 않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타인의 행위에 반응할 수 있고, 그 반응을 통해 공동의 세계를 조정해 나가는 능력이 인간 사회의 핵심 역량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용서가 사라지면 우리는 타인의 행위에 응답할 필요가 없다. 복수가 사라지면, 행위를 교정할 수단도 없다. 응답도 없고, 교정도 없는 세계는 언뜻 보기에는 평온하지만, 실상은 도덕적 무중력 상태에 빠져 있다. 행위는 행위로 끝나고, 잘못은 잘못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사건도 미래의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잘못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잘못이 세계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게 되면, 도덕이 작동할 토대가 사라진다. 도덕은 감정에서의 발생이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용서의 부재는 잘못의 소멸이 아니라 도덕의 소멸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 실험의 영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타인의 잘못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실수다. 우리는 타인의 실수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도 처리해야 한다. 내가 잘못했을 때, 내 잘못이 누군가에게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누구도 나에게 화내지 않고, 누구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내 실수를 어떤 방식으로 정리해야 할까?
책임도 없고, 회개도 없고, 처벌도 없고, 위로도 없다. 관계가 느려지지도 않고, 다시 회복되는 과정도 없다. 그 세계에는 실수 뒤에 찾아오는 독특한 감각, ‘이제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라는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직접 용서를 받지 않더라도, 용서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면 자기 내부의 사고 과정도 함께 무너진다. 타인의 응답이 사라지자, 내 행위의 의미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제의 잘못이 오늘의 나에게 어떤 구조도 남기지 못하고, 내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저 사라진다. 이것은 평화가 아니라, 자기 조정 능력의 상실이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취약함이 곧 용기의 근원이며, 사랑, 공감, 소속감 등 깊은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상처받을 수 있기에 관계는 깊어진다. 타인의 잘못이 나를 흔들 수 있다는 뜻은 곧 나도 타인에게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고, 이 상호적 흔들림이 관계에 두께를 만든다.
타인의 잘못이 나에게 전혀 닿지 않는 사회는 처음에는 편안해 보이지만,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사회가 된다. 갈등이 사라진 자리에는 공감도 함께 사라진다. 우리는 상처를 피하기 위해 벽을 세우지만, 그 벽은 타인의 고통뿐 아니라 타인의 기쁨과 감동도 함께 막아낸다.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곧, 감동받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을 때, 그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통과해 다른 자리로 옮겨놓는 일에 가깝다. 이 감정의 투쟁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더 이상 도덕적 존재가 아니다. 죄책감, 분노, 후회, 연민 같은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잘못해도 괴롭지 않고, 피해를 보아도 아프지 않으며, 결국 정의도 필요 없어진다. 그 사회의 정의는 감정 없는 합리성과 효율 위에 세워지지만, 거기에는 인간적인 떨림이 없다.
복수가 사라진 세상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속이거나 해쳐도 아무도 복수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점차 책임이라는 개념을 잃어버린다. 잘못의 결과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악행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악에 반응하는 인간이 사라진다. 그건 단순한 평화가 아니라, 도덕적 무풍지대다. 분노와 복수심은 위험하지만, 그 속에는 ‘이건 잘못됐다’라는 감정적 판단이 들어 있다. 그 판단마저 사라지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용서와 복수의 부재는 단지 인간성의 결핍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응답 능력의 부재다. 타인의 잘못이 나에게 닿지 않는다면 그 순간만큼은 편안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타인의 잘못뿐 아니라 타인의 선함도, 도움도, 애씀도 나에게 닿지 않게 만든다. 그렇게 세상은 점점 무해해지지만, 동시에 무의미해진다. 관계의 온도가 0도로 유지되는 사회. 누구도 심하게 다치지 않지만, 누구도 누군가를 위해 진심으로 울지 않는다.
나는 그런 세상을 차가운 낙원이라 부르고 싶다. 갈등이 없고, 소음이 없으며, 모두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만, 아무도 서로에게 깊이 스며들지 않는 곳. 그곳에서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지만, 누군가를 위해 흔들리지도 않는다.
진짜 유토피아는 상처가 없는 세계가 아니라, 상처를 주고받더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이다. 용서와 복수는 인간의 약함이 아니라, 인간의 증거다. 그 증거가 사라진다면, 평화는 오겠지만, 그 평화 속에서 인간은 사라질 것이다.
유토피아 실험실 - II. 인간성, 감정의 결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