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의 부재

감시가 없는 세상은 진짜 자유로울까

by Garden




통제는 인간 사회의 그림자다. 우리는 누군가에서 통제받으며 자라나고, 다른 누군가를 통제하며 살아간다. 학교에서는 규율을, 회사에서는 규정을, 국가에서는 법과 제도를 배운다. 그 덕분에 질서는 유지되지만, 그만큼 숨이 막히기도 한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그 자유가 낳는 혼란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통제는 늘 양가적인 감정을 낳는다. 필요하지만, 견디기 힘든 존재.


그렇다면 만약, 통제가 완전히 사라진 사회가 있다면 어떨까? 누구도 명령하지 않고, 누구도 감시하지 않으며, 모든 행동이 오직 개인의 판단에 맡겨진 세상. 그곳에서는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까? 아니면 통제의 부재가 새로운 혼돈을 초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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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회에서는 모든 규제가 폐지되었다. CCTV도 없고, 경찰도 없다. 시간을 정하는 제도도, 출석을 확인하는 문화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처음에는 낙원처럼 보였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모두가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 억압이 없으니 평화롭고 감시가 없으니, 마음은 가벼워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유는 점점 모양을 잃기 시작했다. 감시도 기준도 사라지자, 지켜야 할 선 역시 흐려졌다. 도덕은 개인의 취향이 되었고, 규율은 개인의 자유로운 해석 아래에서 무너졌다. 통제가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자유는 결국 어디까지 흘러가도 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통제는 억압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행동을 제어한다는 건, 그 사람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그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내든 굳이 멈추게 하거나 바로잡으려는 수고 자체를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통제가 완전히 사라진 사회에서는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음이 예의가 되었다. 그러나 간섭이 사라지자, 관심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다. 통제의 부재는 곧 관심의 부재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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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는 처음에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심리적, 상황적 여유를 얻은 만큼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자유의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누군가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고통이 되는 순간에도 그것을 제어할 장치가 없었다. 타인의 고통 유무와 상관없이, “나는 단지 자유를 행사했을 뿐이다.”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행위에 면죄부가 생겼다. 통제가 사라진 사회는 결국, 폭력이 정의를 가장하는 사회로 변했다.


과연 통제란 어디서부터 억압이고, 어디까지가 보호일까? 사람들은 CCTV가 나의 사생활을 침해할 때는 불쾌하지만, 그 덕분에 범죄가 줄어들면 안심한다. 많은 학생은 학교의 규율을 답답해하지만, 그 규율이 없다면 수업은 진행되지 않는다. 통제는 불편함과 안전 사이의 줄다리기이다. 통제가 없으면 불편함은 줄어들지만, 불안은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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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의 본질은 타인의 판단이다. 감정과 충동, 상황의 변수들에 따라 우리의 판단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완벽히 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타인의 판단을 빌려 질서를 만든다. 이러한 의미에서 통제는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억압된 욕망의 존재라 불렀다. 통제는 바로 그 욕망의 안전장치이다. 억압이 사라진 사회는 처음에는 해방감을 느낄지 몰라도, 곧 제어되지 않은 욕망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새로운 혼란을 불러온다.


간단하게 모든 규칙이 사라진 공동체를 상상해 보면, 처음엔 누구나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만, 곧 누군가를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은 욕망이 타인의 시간, 공간, 관계까지 침범하며 갈등이 증폭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욕망은 통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욕망은 언제나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제가 사라진 세상은, 윤리가 사라진 세상이다. 윤리는 법보다 느슨하지만, 그 느슨함이 인간을 지탱해 왔다. 통제가 사라진 사회는 결국 윤리를 잃은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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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통제를 긍정할 수도 없다. 통제는 인간의 자유를 잘라내며 자란다. 우리는 법과 규칙이 정한 속도 제한에 따라 운전해야 해서, 내가 원하는 만큼의 속도로 달릴 자유가 없고, 학교의 시간표와 회사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해서, 하루의 리듬을 내가 선택할 수 없다.


권력이 통제의 언어를 이용해 자신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은 언제나 통제의 가장 위험한 문장이다. 인간의 자유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자유를 조여 온 역사는 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이유는, 자유적정선을 판단할 만큼 성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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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통제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 통제 혹은 내면화된 통제일 것이다.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절제하고 누가 감시하지 않아도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탑재된 상태. 이것은 법의 부재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보다 심리적인 차원이다. 법은 외부의 규칙에서 그치지만, 통제는 내부의 조율이다. 그 조율이 사라지면 인간은 흩어지고 너무 강하면 인간은 질식한다.


언젠가 통제와 관련된 실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감시받는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질서를 유지하지만, 감시가 완전히 사라지면 일부는 자유를 만끽하고 다수는 무기력에 빠진다는 해석. 인간은 누구도 자신을 통제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즉, 인간은 자유를 누리는 법이 아닌, 사용하는 법을 완전히 배우지 못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통제는 인간에게 필수적인가 아니면 단지 공동체가 불확실성을 견디기 위해 구축한 집단적 안정 장치에 불과한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통제는 인간이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이자,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통제가 없다면 인간은 바깥에서 밀려오는 불안도, 마음속에서 솟는 불안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통제가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기도 하지만, 그 통제가 사라질 때 인간은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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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상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누군가를 감시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사회.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지 않고, 책임이 강요 없이 작동하는 세계. 그곳에서 통제는 존재하지만, 그 통제는 외부의 명령이 아닌, 내면의 신중함으로 작동한다. 즉, 통제의 존재가 억압이 아니라 균형이 되는 것이다.


통제가 없는 사회는 혼돈되기 쉽고, 통제가 과한 사회는 무기력에 빠진다. 진짜 문제는 통제의 여부가 아니라, 그 통제가 어디서 비롯되느냐이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통제는 폭력이지만, 사랑에서 비롯된 통제는 보호이다. 인간이 타인을 위해서 통제할 때 그것은 억압이 아니라 배려가 된다. 결국 통제의 본질은 권력이 아니라 관계이다.


진짜 유토피아는 통제가 없는 세상이 아니라, 통제가 강요되지 않아도 스스로 균형을 찾는 세상이다. 자유가 무질서로 흘러가지 않고, 절제가 억압이 되지 않는 세계. 그때 통제는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단지, 형태를 바꾸어 자유의 다른 이름으로 남을 뿐.



유토피아 실험실 - III. 사회, 제도의 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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