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통해 자기 미움을 통과하기
새로 근무하게 된 부서에서 한 선생님을 만나게 됐었다.
따뜻하면서도 때로는 차가운 친절함, 가볍고 연약해 보이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을 챙기는 진중함이 돋보였다.
그분은 내 얘기를 잘 들어주고, 서로 관심 있을만한 내용들이 있을 땐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곤 했다. 그렇다고 해도 나보다 한참이나 어리고 나와 경험치가 다를 테니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챘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항상 내가 직위를 이용해서(?) 쓸데없이 지껄인다는 공허한 마음이 들곤 했다. 대체 나란 인간은 직장에서도 제멋대로구나 싶어 나에 대한 미움이 더해지곤 했다.
어느 날부터인지 그분을 보는 것이 마치 미술관이나 전시회의 작품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 예술적 요소가 보이지 않는 분인데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 이미지는 점점 선명해져서 ‘청회색 매끈한 달항아리’로 수렴되었다.
그 선생님이 다른 부서로 이동할 때 편지를 받았는데, 그걸 읽자 일시에 밝아지면서 평온해지는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그분은 나와의 대화들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일련의 행위들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내가 쓸데없이 지껄인다고 여겼던 것들이 그분에게 가서 의미 있게 되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예상 밖이다!
항상 생각이 너무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너무 많지만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는 내 모습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그분의 ‘꾸준함’에 기여했다니 놀라운 이야기였다. 내가 의미 있는 인간일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감이 느껴졌다.
몇 년 전에 British Museum에서 봤던 이수경 작가의 금선으로 채워진 도자기 작품이 생각났다. 그걸 보면서 내 인생도 조각조각 나더라도 반짝이고 값진 금선(金線)으로 채워져서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가기를 바랐었다. 이제 나에 대한 불편감들이 그 자체로 나름의 반짝이는 인생이라는 점을 생각한다. 나도 한 점의 도자기가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업무로 만난 동료로부터 내면의 갈등을 해소하고 삶의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나의 엔트로피가 타인에게 네겐트로피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나의 일상에서 멀어진 그 선생님을 생각해 보면, 이것을 깨닫는 것이 내 삶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였지 싶다. 칼 구스타프 융에 의하면 해결된 과제는 더 이상 무의식에 의해 현실로 투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생의 한 에피소드가 끝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감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된다.
[그림 1] 자아 파편의 통합 위상도(Phase Portrait of Self-Fragmentation Integration): 사유를 바탕으로 AI가 생성한 심리-물리학적 전이 모델. (© 2026. 가로등 & Gemini Collabo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