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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령 May 29. 2023

백수간호사 일기

대학병원 7년 차 간호사의 첫 퇴사기


2023. 4. 7 1년 간의 청원휴직이 끝나는 시점을 기준으로 나는 퇴사 처리를 하였다.

햇수로 7년 간 일해왔던, 20대 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애증의 첫 직장.

나의 퇴사는 아마 몇 년 전부터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아왔던 것이었는 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퇴사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버티는 게 답이라 생각했기에 합당한 이유들로 나 자신을 속이며 버텨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어이없이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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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결정한 후 2시간은 별 생각이 없었다.

복직면담을 한 날, 동기 친구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어서 퇴사를 결정하는 순간에도 옆에 친구가 있었고, 큰 결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나 정말 잘한 선택이라고 호탕하게 웃어넘기던 와중에 갑자기 ‘아, 나 이제 뭐 하지.’ 하는 생각이 치고 들어왔다.

그 순간엔 친구들과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깊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불안감, 공허함으로 가득 찬 마음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

‘뭐 먹고살아야 하지?’

‘뭐 해야 하지?’


하,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불안감과 막막함은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학창 시절엔 자연스럽게 중고등학교를  진학했으며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공부 외에 나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순간이 왔지만, 정신과 의사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던

나는 결국 성적에 맞춰 간호사가 되기로 하면서 미래의 고민은 짧게 끝났다.

간호학과 진학 후, 취업 전선에 뛰어들며 두 번째 선택의 갈림길에 섰지만, 예나 지금이나 간호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병원은 정해져 있었고, 그곳이 내가 가야 할 곳이자 나의 종착지였기에 고등학생 때보다 빠른 결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대부분 간호학생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꿈의 직장인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되었다.

이처럼 정해진 길, 어떤 면에선 단순한 길을 걸어왔으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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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것처럼 나의 첫 직장은 간호사가 일할 수 있는 병원 중 손에 꼽히는 TOP5 대학병원 중 한 곳이었기에 그곳에 다니며 받았던 연봉이나 각종 혜택, 주변의 평판은 쉽게 무시하고 넘길 만큼 가볍진 않았다. 알게 모르게 이미 그것에 익숙해져 버린 나에게, 갑자기 결론이 나버린 ‘퇴사’라는 것이 내 인생에 있어 큰 사건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몸과 머리가 밤낮 구분 없이 지역방송을 틀어대기 시작했다.

오직, 부정적인 것에서만 몸과 마음이 한마음 공동체를 결성해 나를 각성시키며 괴롭혔다.


‘그래, 사회적 기준에선 최고의 병원일지 몰라도 나의 기준에선 이 병원이 최고가 아닌 거야.‘라고 머리가 소리쳐도 마음은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다.

 잘 사는 것에 있어서 나와 사회가 말하는 기준이 이토록 다르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사회가 말하는 기준이 곧 나의 기준이라 생각했고, 그 기준에 맞춰 살아왔기 때문 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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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건으로 돌아와 말해보자면, 퇴사를 선택하고 사건을 일으킨 피의자가 되기로 한 이유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간호사로선 피할 수 없는 교대근무였다.

그동안 간호사로서 살아온 나의 삶에서 남은 건 몸의 고통뿐이었다. 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발 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작 30살도 되지 않은 푸릇푸릇해야 할 청춘은 그의 부모보다 아프다는 소리를 자주 했고 병원을 주기적으로 다녔다.

그리고 몸이 망가진 후에야 마침내 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규칙적인 생활이 마음의 안정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1년 간의 휴직을 통해 낯선 땅에서 바라본 나의 지난 삶을 다시금 생각하며 다짐했다. 한국에 돌아가 다시 교대근무를 해야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만두겠다며, 이 다짐을 잊지 않고자  다이어리에도 작성해 두고 주변 지인들에게도 알렸다.  

근데 나의 굳은 다짐이 부당한 방식으로 ‘모 아니면 도’ 선택으로 탈바꿈되어 내 마음속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주위에 퇴사하고 의료계를 떠난 동료, 퇴사 후 재입사한 동료, 다른 분야로 이직한 동료들이 있고 그들이 건네는 여러 방식의 위로는 여전히 태풍 속에 고립되어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모든 이가 그렇듯 나의 고통은 남들보다 특별하고 가장 아프다고 생각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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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길을 잃은 아이가 되었다.

아이는 혼자 남아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데,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이 아이는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찢어졌다.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을 때 온 가족의 지지를 받았고, 스스로도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믿고 싶은데.

옳고 그름을 떠나 내가 힘들어하듯 나의 영원한 지지자인 엄마도 힘들어했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더 이상 교대근무를 하지 않았으면 했기에 퇴사를 말리지 않았던 엄마지만, 이 험난한 사회 속에서 꾸역꾸역 살아온 엄마는 사회가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잘 살기 위한 조건‘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매월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직장을 다니면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테니. 더군다나 내가 직장을 그만두면 해외 간호사를 준비할 가능성도 커지기에 자식 두 명 중 한 명이라도 곁에 남겨두고 싶었는데 남은 자식마저 본인 곁을 떠날까 봐 갑작스레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껴 울음을 터뜨리셨다.


나의 선택이 부모님께 영향을 미치는 점이 너무 죄송하게 느껴졌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내가 부모님의 자랑을 빼앗아버린 것이었다.

한국 가정의 특성 때문일까, 나와 엄마의 사이가 두텁기 때문일까.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께 죄송해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자식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그리고 그걸 바라보며 커 온 자식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유대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본인의 슬픔을 누르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나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그의 말에 나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해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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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정말 다행인 건, 내가 느끼는 이러한 감정들이 어디서 왔고 그 이유를 적어나갈 수 있으며,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인지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막막하지만 주저앉아서 한탄해 봤자 바뀌는 건 없고,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확신을 가지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당장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다면 잘한 선택이 되게 하기 위해 그만큼 열심히 잘 지내면 된다는 것이다.

비록 내가 다시 유턴을 해서 같은 위치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래도 나 이만큼 했어!’ 하고 스스로에게 당당해질 수 있게 말이다.


이번 퇴사를 발판으로 삼아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이 아니라 나의 기준에서 좋은 직장, 나의 일을 찾아나가며, 내가 가진 무기를 다시 정리하는 시간도 갖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나갈 것이다.

1년, 5년 혹은 10년 뒤, 나는 남이 정해놓은 배경에 기대어 살지 않고, 나 스스로가 배경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인생의 전환점에 서있는 2023.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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