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쉰이다. 어렸을 적 나에게 '쉰'은 할머니였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우리 엄마가 삼십 대였기에 당연히 오십 대는 할머니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내가 다가갈 수 없는 먼 시간을 보내는 분이었고, 고등학교 때 '쉰'은 엄마의 언니쯤 되는 목소리도 크고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무서운 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갔을 때의 '쉰'은 부하 직원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지만 너무 바쁘고 너무 힘든 상사들이었고, 결혼해서 '쉰'은 결혼 생활의 선배 뻘 되는 사이여서 힘들 때 도움을 주고 '그때가 좋은 때'라며 하고 싶은 거 다하라 격려하는 선배와 언니 사이 어디쯤이었고 내가 마흔이 되어서 쉰은 그저 맥주 한 잔 가벼이 함께 기울일 수 있는 친한 언니 같은 편안한 나이였고 내가 '쉰'이 되었을 때의 '쉰'은 어릴 적 모습 하나도 변하지 않은 여전히 학창 시절 꿈 많고 끼 많은 친구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십 대나 삼십 대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듯한데 주위에서 보는 나는 누군가에겐 할머니고 어떤 이에게 엄마의 언니고 신입사원에겐 직장 상사인 셈인 그런 때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이젠 어느 모임을 가도 나이로 지지 않고 나보다 훨씬 감각적인 후배들의 센스에 한발 뒤로 주춤할 때가 있다.
'쉰'이 되니 좋아지는 숲 처음엔 '쉰'이라는 나이가 무섭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동안 뭘 했는지 뒤돌아보니 그저 시간에 쫓기어 정해진 틀 속에서 다른 이와 다를 게 없는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을 뿐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뭘 해놓은 게 하나도 없는 듯하고 먼저 '쉰'이 된 선배들의 '갱년기' 경험을 들으며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감수해내야 하는 변화무쌍한 시간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철이 없이 좌충우돌 천방지축 대면서 '쉰'이 주는 무게감과 현실의 간극을 느끼지 못하다가 문뜩문뜩 내가 '쉰'이 됐나 보다고 느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들이다.
아~~~ 내가 '쉰'이구나,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할 때를 느끼는 첫 번째 신호는 택시를 탈 때다. 이제까지 택시에서 내가 하는 말은 "OO으로 가주세요"와 "감사합니다"가 전부였다. 그런데 요즘 택시를 타면 택시 기사님도 내가 편해 보이는지, 아님 같은 연배로 느끼는지 자꾸 세상 살아가는 얘기며 정치 얘기를 건네신다. 예전 같으면 "아, 예~~"하고 무심하게 넘길 것을 요즘은 어쩌고저쩌고 내가 더 많은 말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정치인이 어쩌고저쩌고, 아파트 값이 어쩌고저쩌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저씨와 내 수다는 끊이지 않고 어떤 때는 내가 먼저 이러쿵저러쿵 수다쟁이 아줌마가 되어 택시 안 가득 말주머니를 내뱉어 낸다. 그러고 나선 한참 후회다. 내가 왜 그랬을까? 창피하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해서 헛웃음이 날 때도 있다. 이럴 때 '아, 정말 내가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생각한다. 어렸을 땐 모르는 사람과 말을 많이 하는 엄마나 주위 어른을 보면서 처음 본 사람하고 어떻게 저렇게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나 했는데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정말 모르는 사람도 어제 만난 친구처럼, 동네 아는 분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또 내가 '쉰'이구나,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하고 느낄 때는 나랑은 상관없는 모든 일에 참견을 하고 있는 나를 느낄 때다. 차를 운전하고 가면서도 '저기, 할머니 힘들어서 어쩌고저쩌고, 짧은 치마가 어쩌고저쩌고, 담배가 어쩌고저쩌고, 저 농작물이 어쩌고저쩌고' 눈에 들어오는 온갖 사물을 평가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일까지 입바른냥 참견을 하고 있는 나를 본다. 그런데 가만히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 모든 참견은 때론 엄마의 마음(엄마는 아니지만)인 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의 마음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내 마음을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혹시 꼰대라고 하는 그거 아닐까 느껴지기도 한다.
또 관공서나 낯선 곳을 찾아갔을 때 예전보다 덜 긴장되고 덜 무섭다는 것도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생각하는 지점이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면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라는 믿는 구석이 생겼다. 물론 지금이야 앱이 너무 잘되어 있어서 가끔 길을 물을 때 말을 내뱉기가 부끄러워질 때도 있지만 예전엔 혼자 뭔가를 한다는 거에 어색하고 힘들다가 요즘은 그게 좀 없어진 느낌이다.
그리고 또 내가 나이를 헛 먹진 않았구나 생각할 때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덜 화가 난다는 점이다. 예전엔 조금만 나와 생각이 달라도 핏대 세우며 얼굴 붉히며 그건 아니지라고 쌈닭같이 굴었다면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 몰라서 그랬나 보지. 할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요즘은 그렇게 화가 많이 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쉰'이구나. 이제 노년기구나 느낄 때는 내가 갑자기 정치인이 된 것 같이 느껴질 때다. 별로 정치에 관심이 없고, 그리 정치 얘기에 나서지도 않았던 내가 요즘은 누가 잘하니 못하니, 정책이 어쩌니 주절대며 한참 뉴스를 드라마보다 열심히 본다. 몇 번 국회의원이 돼 본 사람처럼 그럼 안되지~~ 하고 있다. 하늘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면 참 어이가 없을 때도 많다.
그리고 점점 영양제 광이 되더니 한 번뿐인 인생 힘들게 살아서 뭐하랴라고 빈둥빈둥거릴 때도 많다. 그건 힘들어서 안 되고, 이건 멀어서 안 가고, 저건 비싸지만 사고. 도대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진을 찍고 싶으나 변해가는 모습이 싫어 뽀샤시 보정하고 좋아하고. 요즘 노래를 좋아하고 따라 부르려 해 보지만 가사가 안 들리고 몸은 박수나 발만 한 박자 왔다 갔다 하는 춤을 춘다. 그리고 점점 툭하면 눈물이다. 이렇게 요즘 난 할머니와 어린애를 하루에도 수만 번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그렇게 '쉰'과 '나' 사이에 도대체 화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 인생의 한 번뿐인 '쉰'을 정말 요란스럽고 버라이어티 하게 지내고 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코로나의 습격을 받더니, 전무후무한 긴 장마를 견디고 나니 태풍이 연거푸 몰아닥치고, 수업이 줄고, 취소가 되고 여행 한 번 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경계해야 하고. 주변이 너무 시끄럽고 너무 우울하다. 나이도 바뀌고 몸무게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고 또 무엇이 바뀌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