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의 시작

by 가시나물

길이 끝난다. 다시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연극이 막을 내린다. 관중들은 새로운 연극의 시작을 기다린다. 한 생명이 끝난다. 그리고 어디선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나의 사십 대가 마무리 된다. 그리고 오십 대가 조심스런 시작을 알린다.

그 시작의 서막은 몸이다. 가까운 글씨가 보이지 않고 머리숱이 적어지고 흰 머리가 생기고 생각과 말이 헛발질을 하기 시작했으며 매달 걸리던 마법에도 차츰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우스개 소리로 밥을 먹을 때도 뭘 자주 흘리고 어깨가 허리가 무릎이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노년의 시작이라고 푸념한다. 더 이상 팔팔한 청춘도 아니고 더 이상 작은 일에 흥분하고 시간과의 싸움에 결코 지는 법이 없음을 온 몸으로 저항하던 내 삶의 전초전은 이제 끝이라고 나지막이 되뇌고 있는 요즘이다.

몸도 마음도 그 변화를 따라가기 쉽지 않은 오십이 되면서 여러 가지를 시작해야 하지만 그 중엔 마음 단단히 먹고 내가 준비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제 곧 닥칠 일은 아니지만 방심해서도 안 되고 먼 훗날의 일이라 마음 놓아서도 안 되는 ‘부모님과의 헤어짐’이다. 언제나 힘이 넘치고 언제든지 달려가면 넉넉히 안아줄 큰 품이라고만 생각했던 아버지가 작년 여름 가슴이 아프다며 서울에 있는 병원엘 가야하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생계에 바쁘고 비행기 공포증까지 있던 동생과 나는 제주에 있는 병원도 많이 좋아졌다고 여기서 치료를 받으시면 어쩌겠냐고 아버지를 말렸었는데 무슨 일인지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으시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셨다.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고집 덕분에 뜻하지 않게 온 가족이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오누이가 모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고 자기 직업이 있어서 오롯이 네 식구가 이렇게 모인 적이 없었는데 병원 근처 작은 아파트에서 엄마와 아빠와 동생과 누나인 내가 오밀조밀 모여 밥을 해먹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낯선 곳에서 시장을 보고 손에 익지 않는 요리 도구로 간단히 차린 미역국과 반찬들이었지만 그 날 그 시간은 우리 가족을 넉넉지 않았던 이십 여 년 전으로 데려다 주었다. 내일의 진료가 불안하기도 했지만 옛날 이야기에 웃을 수도 있었고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다는 서글픔도 들었다.

의사는 어디서인지 모르지만 심장 주위에서 출혈이 너무 심하고 맥박이 너무 낮다며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느냐고 의아해 했다. 몇 번을 쓰러져도 쓰러졌다며 계속해서 혈액을 공급했다. 출혈 부위를 찾기 위해 이런 저런 검사를 다 했는데도 원인을 못 찾고 결국 대장내시경까지 해야 했는데 검사가 끝났는데도 대장 출혈이 멈추지 않아 또 한 번의 시술을 다시 해야 해서 너무 불안하고 답답했다. 아버지는 인공 심장 박동기를 달고 나서야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다. 권투 선수들이 쓸 것 같은 하얀색 머리 보호대를 하고 병원에 머물러야 했는데 힘들다 하시면서도 병원은 두 분의 사이를 강제로 가깝게 만들었다. 입원실에서 머리를 감겨 드려야 하고 가려운 등을 긁어줘야 했으며 로션도 듬뿍듬뿍 발라줘야 했다. 병원이 너무 넓어서 엄마가 힘들면 어쩌나 했는데 금방 잘 적응하시고 씩씩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런 부모님을 두고 다시 제주로 오려고 하니 눈물이 났다. 택시 타는 곳까지 나와서 쉰이 다 된 딸이 어떻게 가나 손을 흔드는 모습에 빨리 들어가라고 했지만 끝내 엄마는 내가 탄 택시가 떠나고 나서야 그 큰 병원 회전문으로 발길을 돌리셨다.

하지만 병원을 다녀 온 그 후로 부모님은 몰라보게 야위어 가는 것 같다. 과수원에서 조금만 힘을 쓰면 팔과 다리가 저리고 숨이 가쁘고 힘겨워하신다. 여태껏 그런 모습에 익숙지 않았던 나는 가끔씩 부모님을 뵙고 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부모님을 만나면 자꾸만 핸드폰을 들이대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밭에 있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노래를 부르시거나 운동을 하는 보통의 일상인데도 가끔은 음성까지 녹음해 가며 그 시간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기를 쓰고 있노라며 사진 찍는 걸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내 마음속에선 나도 모르게 ‘헤어짐’의 그 뒤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안 계신 삶.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없는 시간 말이다. 서로 말은 안 하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사실은 세월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준비하는 ‘헤어짐의 시작’은 슬프지만 웃을 수 있고, 아쉽지만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시작은 담담할 것이며 따뜻할 것이며 요란하지 않고 조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을 할 수 있는 한 서두르지 않고 가능한 천천히 한 걸음 한걸음 내딛고 싶다.

keyword
이전 01화'쉰'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