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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Jan 15. 2021

1984년이 묻는 2020년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2020년 지구는 떠들썩하다. 코로나 19로 여행길이 끊기고, 무역이 중지되었으며 국경을 폐쇄하고 바이러스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며 풀리지 않는 숙제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무사히 지나가 주길 바랐지만 '코로나'는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 또한 나라마다 그 방법이 천지차이였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해야 하니 마스크를 쓰는 것에 자유를 달라,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는 미국이 있는 반면, 강제적 국가의 명령에 따라 개인의 자유를 봉쇄하고 이동을 제한시킨 중국도 있었다. '집단 면역'을 하다 실패를 인정한 스페인도, K방역에 대한 믿음과 실망이 하루에도 몇 번씩 뒤집히는 요즘이다. 사상 초유의 팬데믹 상황을 보면서 국난 극복에 있어 개인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공동체의 삶이 어떤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상시국엔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최소한 제한하는 것에 대한, 그리고 일정 부분 자유를 제한하는 것에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을 얻고 있는 분위기인 지금이지만 그래도 조지 오웰이 우려했던 ‘전체주의’의 잔재가 혹여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가 우려가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는 허용하지 않고 모든 권위를 정부와 집단에 일임시키는 전체주의는 1920년대 이탈리아의 독재자였던 무솔리니가 새로운 파시즘 국가를 지칭하면서 시작되었다. "국가 안에 모두가 있고, 국가 밖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처럼 전체주의는 소수보다는 전체를, 개인보다는 국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전체주의의 오만과 독선을 조지 오웰은 ‘1984년’에서 국가 권력이 어떻게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묵살시키고 유린하는지 주인공 윈스턴의 행보를 통해 차갑고 서늘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에서 국가는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 사상경찰을 통해 모든 개개인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가장 개인적이어야 할 공간인 집에서조차 사람들은 평안을 찾을 수 없고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토로하지 못한다. 인간의 성은 한낱 새로운 공산당원을 생산해 내는 도구이며 ‘사랑’이나 ‘행복’은 당에 대한 사랑이고 행복이어야만 한다. 이렇게 모두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뇌되고 감시당하며 삶의 목적을 획일화시켜간다. 

 거기다 사회주의의 유지를 위해 당은 인간의 사상과 쾌락마저도 당의 통제와 지시를 받게 하며 과거 역사를 당의 예언에 일치시키기 위해 개조 수정하는 악랄함을 드러내며 영국 사회주의의 사상에 대한 적절한 표현방법을 창안해 내는 동시에 다른 사상을 갖지 못하도록 신어를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신어 때문에 점차 어휘력이 감소되고 간편화 되며 획일화 되어간다. 때문에 개인의 사상 또한 획일화되고 단순화되어 국민은 자신의 자유가 억압을 받는지,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국가의 대부분이 무산계급인데도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복종과 강제로 점철된 삶을 살 뿐이다. 그들이 일어서고 자유를 찾기 위해선 깨달음과 의식 전환이 필수조건인데도 당의 철저한 계산과 감시는 그들을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모두를 위한 제도로 위장한 소수의 제도임을 알지 못한다면 개인은 평생 한낱 도구일 수밖에 없고, 버려지는 소모품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국민들이 의지하고 믿었던 당은 결국 2%에 불과한 내부 당원의 호위호식과 타락을 위해 무산계급의 희생만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빌미로 나라를 긴장시키고 왜곡된 숫자로 경제를 발전시키며 숙청 대상이 된 사람은 ‘무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란 무지막지한 제도 속에서도 강하게 살아남는 모양이다. 아마도 인간이란 본성 그 자체에 사랑을 추구하고 자유를 갈구하는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전 보았던 영화 ‘아일랜드’에서 주인공 남녀가 신세계의 위선을 깨닫고 과감히 모든 굴레를 벗고 탈출하듯이 윈스턴과 줄리아 역시 폐쇄된 체제 속에서도 자신들만이 불안한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밀회는 결국 오브라이언의 치밀한 계획 아래 꼬리가 잡혀 무자비한 고문 앞에 유린당하고 친구 파슨스 역시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는 잠꼬대로 일곱 살 친딸에게 밀고를 당하게 된다. 

 인간에게 사랑이란, 그리고 믿음이란 무엇일까? 과연 내가 줄리아나 윈스턴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내 한 몸 건사하기 어려워 몇 번이고 연인을, 가족을 배반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내가 가장 끔찍하게 여겼던 건 개인의 정신세계를 말살시키고 세뇌시키기 위해 ‘이중사고’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몸서리쳐질 것 같은 고문 장면보다 더 인간에게 가혹한 것이 자신이 하는 생각과 행동이 다른 힘에 의해 꼭두각시 놀음에 흔들린다면 ‘나로서’, ‘나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나를 몰살시키는 ‘이중사고’로 무의식까지도 거짓으로 세뇌시키려는 혹독함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으며 개인의 존엄이 무자비한 무력 앞에 얼마나 허망하고 나약한지를 보여주는 듯해서 소름이 끼쳤다.  

 마치 어린 코끼리가 사슬과 채찍에 길들여져서는 다 성장해서도 그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이중사고’에 갇힌 인간의 정신세계는 당이 쳐놓은 사슬과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쳐놓은 사고의 덫에 갇혀 평생을 사고할 수도 판단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게 되고 말 것이다. 


 1984년이 2020년에게 묻는다. 지금의 세계는 아니, 대한민국은 얼마나 개인의 사고와 비판과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인지 말이다. 개인의 존엄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으며 사생활이 얼마나 보호받고 있는지를 말이다. 적게는 개인의 신용이나 정보가 허술하게 새 나가고 도로마다 마을마다 CCTV가 설치되어 있고 휴대폰은 언제 어디서고 개인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하는 지금이 ‘조지 오웰’이 그려낸 ‘1984’년과 뭐가 다를까.

물론 지금의 '코로나 시대'에 개인의 권리와 자유만을 주장할 순 없지만 또 그런 관점에서 문제를 논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혹은 우리 모두에게 피해를 가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는 쪽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조지오웰이 그려낸 미래의 세계 '1984'. 아마도 조지오웰이 글을 쓰던 냉전시대의 현실을 비판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그가 우려했던 바들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감시되던 시대, 3S(Screen, Sports, Sex)가 우리에게도 분명 있었다. 그리고 다수결이라는 무자비한 횡포로 소수의 의견이 묵살되고 마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또 다른 모습의 '1984'인 것이다.   


 지금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고급 지식을 움켜쥐고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자 바로‘ 빅 브라더’다. 사건을 개조하고 역사를 외면하고 국민들의 눈을 가리는 자 또한 ‘빅 브라더’다. 개인의 정당한 발언을 호도하는 자, ‘빅 브라더’인 것이다. 

 참된 자유의 세상과 진정한 민주주의가 서는 그런 나라, 개인의 삶이 존중받고 행복함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기대한다. 

 ‘1984’년이 다시금 몇 년 후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아무런 확답을 할 수 없기에 나는 감히 대답한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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