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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Dec 31. 2020

오베라는 남자 VS 말하는 나무

-소설책에서 그림책의 향기를 맡다-

 너무도 매력적인 남자를 만났다.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서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멋진 외모나 부유해 보이는 차림새를 기대할 순 없다. 다만 다부진 체격에 큰 키, 노동으로 다져진 근육으로 그가 살아온 시간의 묵직함과 우직함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심술궂은 꼰대 같은 모습을 상상하게 하면서도 그는 결코 수다스럽거나 복잡하거나 소란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만의 원칙과 소신만으로 살아온 그의 이름은 오베다.

 난 책을 읽는 내내 오베라는 남자의 매력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남긴 따뜻한 여운에 취해 잠시 책장 덮는 걸 보류하고 다시 읽어봐도 좋을 책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시간이 지난 어느 때쯤 그를 다시 만난다면 처음에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그런 사람인 줄 늦게 알아채서 죄송하다 말하고 싶다.


오베라는 남자의 기상 시간은 6시 15분 전이다. 눈을 떠 커피를 내려 부인과 함께 마신 후 동네 시찰을 나간다. 초기 정착민이었던 오베는 마을 안팎을 살펴 규칙을 어긴 것들이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는 것을 일과의 첫 의무로 삼는 원칙주의자다. 그리고 그의 특유의 성실함은 한 세기의 3분의 1을 똑같은 직장에서 보내게 만들었다. 다니는 동안 병가를 낸 적도 없고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으며 자기 몫의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미루지도 않았다. 오로지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쉽게 떠벌이지도 않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동료가 지갑을 훔친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어도 끝끝내 제 입으로 옮기지 않았고 까칠하지만 허례허식이 없는 남자로 아버지의 첫 차였던 사브를 오베도 평생 종류를 바꿔가며 사브 만을 타고 다녔다.

그런 오베였기에 세상과 만나는 것이 그렇게 녹녹하진 않았다. 친구도 없었고 오베가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없었다. 단 한 사람 소냐만이 그를 웃게 했고 열정을 갖게 했다. 그래서 사랑 제일주의자였던 오베는 아내인 소냐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마주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결코 살아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죽어서도 아내 곁에 묻히길 바랐다. 그리고 스페인 여행을 가서 불의의 버스 사고로 자식을 잃고 다리를 쓸 수 없는 장애인이 되어버린 부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 지키고 보호했다. 오베는 그런 남자였다.    


 '오베라는 남자'는 스웨덴 작가인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으로 겉으로 보기엔 심술 맞고 퉁명스럽던 오베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뒤를 따라가기 위해 자살 계획을 세웠지만 번번이 철없는 이웃들의 방문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주어진 명을 다 살고 편안히 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다.

 오베에겐 부인이 삶의 전부였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부인이 지금보다 더 사랑해줘야 한다는 말에 그렇게 하겠다 대답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한다. 지금까지 보다 더 소냐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긍정적이고 밝은 소냐와 달리 과묵하고 찬 바람 쌩쌩 부는 오베는 그렇게 자신의 소통 창구로 소냐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소냐의 상실은 오베가 더 이상 삶을 지속할 이유를 만들어 주지 못했다. 그리고 점점 오베로 하여금 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섬이 되게 했다.

 오베가 그렇게 세상과 담을 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어릴 적 가난하고 외로웠던 유년의 기억과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로 대신되는 공권력에 의한 피해와 사람들의 거짓 그리고 위선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으로 강제적으로 집을 뺏기고 원치 않지만 요양원으로 보내져야 하는 사건이 생길 때마다 오베는 하얀 셔츠의 남자를 결코 이길 수 없을 거라 낙담한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이 아내 없는 세상과 스스로 이별하는 것이었다.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지 신기하게도 오베가 자살 시도를 할 때마다 이웃들이 오베의 문을 두드렸다. 파르바네 가족, 어릴 적 화재에서 오베가 구해낸 지미, 옛 친구였던 아니타와 루네, 신문 기자, 동성애자인 아드리안과 미르사드 등 그들의 이웃들은 다문화 가족이었으며 가정 폭력에 시달렸고 사회보장제도에 의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는 노부부였으며 동성애자들이었다. 모두가 사회의 약자였으며 모두가 오베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오베의 곁으로 다가갔고 오베의 집을 넘나들었으며 오베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무기력하고 세상에 관심이 없던 오베를 문제의 해결사로 만들었다. 결국 오베는 이웃들과의 좌충우돌 사건으로 점점 그들과 교감하며 정을 나누다가 평화롭고 조용한 그만의 작별을 고한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수선스럽지 않은 그런 죽음 말이다.  



'오베라는 남자'를 읽으면서 그림책 오스카 와일드의 '말하는 나무'가 생각났다. '거인의 뜰'을 개작한 그림책이다. 욕심 많은 거인이 외출에서 돌아와서 본 것은 자신의 정원을 망치고 시끄럽게 놀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화가 난 거인은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무섭게 내쫒았다. 아이들이 사라져 정원이 조용해지자 거인은 정원을 손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은 정원. 하지만 그 뒤 아무도 거인의 정원을 찾는 이들은 없었다. 거인은 외로워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정원에 다시 올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조그만 틈 사이로 거인의 정원을 발견한 아이들이 호기심에 그곳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정원 한가운데 있는 나무를 발견했다. 나무에선 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거인의 심장이라고. 이백 년 동안 너희들을 기다렸노라고. 혼자만의 세상을 짓고 담을 쌓고 자신의 정원에 아무도 발붙이지 못하게 하다가 너무 외로워 말하는 나무가 되었다는 거인 이야기.

      아쉽게도 품절이다

오베와 거인 모두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에 서툴렀다. 어떤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으로 스스로를 외로움의 감옥에 갇히게 만든 그들. 세상을 향해 나 아프다고, 나 외롭다고 말하지 못하고 피하고 화내고 투덜대는 모습으로 남은 오베와 거인. 그들에게 작은 틈이 되어준 건 아이들과 이웃이었다. 너무 늦긴 했지만 거인은 나무로 변한 후에야 아이들에게 진심을 보였고, 오베는 이웃들과 섞여가며 그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방법들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말하는 나무와 친구가 됨으로써 거인의 마음을 받아들였고 오베의 이웃들은 오베가 자신들의 작은 영웅임을 알게 되며 그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결국 얼음을 깨는 건 작은 틈이고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따뜻한 햇볕이었다. 거인이 아이들과 함께 한 정원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것임을 깨닫게 되고 오베가 자신의 모든 것을 이웃에게 선물하며 떠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오베라는 남자'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오베와 이웃들의 관계도였다. 막무가내로 들이닥쳐 오베를 괴롭게 만들지만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파르바네와 오베의 츤데레 매력을 빛나게 만들었던 지미나 동성애자 청년들, 선입견이 있는 이웃이었으나 루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해 준 앤더스. 이 인물들과의 일화를 통해 독자들은 오베가 어렵고 괴팍한 꼰대가 아니라 사실은 외롭고 슬픈 사람이었으며 주위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고 도움을 주는 작은 영웅이었다는 점을 느끼게 만들었다. 또한 그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이 너무도 재미있고 통쾌해서 오베를 통해 약자들의 상쾌한 반란을 대리 만족할 수도 있었다. 거기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 하나는 발랄하고 유쾌한 비유법들이다. 수려한 수사로 한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는 우리네 소설과는 달리 한 문장으로 간결하지만 유모 코드를 장착한 기발한 문장들이 적재적소에 포진되어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오베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의 흐름이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계속해서 들락거리는 데도 회상과 현재의 그 연계가 조금도 막히지 않고 자연스러워서 오베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됐는지를 이해하는데 조금도 막힘이 없는 세련된 소설이었다.    


 소설은 억지스럽지 않아야 한다. 사건이 생기게 된 원인과 이유가 흥미로워야 하며 그 연계가 논리적이고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이 의심하지 않고 등장인물에 동화되어 마치 내 얘기인 듯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인 듯 그렇게 이야기 속에 빠져 감동과 재미에 허우적댈 수 있다.

 이 소설 '오베라는 남자'는 나에게 그런 마력을 주었다. 그리고 오베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가끔 욕쟁이 할머니 선술집에서 푸짐한 안주를 앞에 두고 욕 한 바가지씩 함께 마셔야 술맛이 나는 것처럼 매력적인 오베는 그렇게 때론 시큼하게 때론 달콤하게 내 마음속에서 여러 번 우려 지며 그렇게 되살아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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