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과 구화인 그리고 청인
"나는 무엇이라고 불려야 하는 거야? 청각장애인? 구화인? 농인?"
우리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을 어떤 식으로 가리켜야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질문의 이면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까지 필요한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하는 것일까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질문 덕분에 귀가 들리지 않는 우리를 가리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용어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과 누군가에게는 이 용어들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무엇으로 불려야 하는 것일까?
1. 장애의 유무와 의사소통 방식에 따른 구분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큰 틀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지칭하기 위해서 많은 용어들을 사용한다. 성별에 따라 남자, 여자로 불리기도 하고 인종에 따라 백인, 흑인, 황인으로 불리기도 하며, 나이에 따라 노인, 장년, 청년, 소년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것들이 그렇다. 이 외에도 결혼의 유무, 자녀의 유무, 지향하는 성정체성에 따라서도 우리는 서로를 다양하게 지칭한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용어들 틈 속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서로를 지칭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렇게 큰 범주 아래 또다시 장애인은 어떤 불편함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신체적 장애, 정신적 장애로 나뉘며 현재는 총 15가지의 장애로 분류하고 있다. 그중에서 청력의 손실이 있는 이들을 가리켜 우리는 '청각장애인'이라고 부른다.
여기까지 이해했다면 이제 스스로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이고, 여자이며, 한국에서 살고 있는 황인이자 청력의 손실이 있는 청각장애인이다." 여기까지는 당신도 나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보면 청각장애인의 세계에는 또 다른 용어들이 펼쳐진다.
'청인'과 '농인' 그리고 '구화인'.
대체 뭘까?
1. 청인과 농인
비장애인과 장애인은 한 인간에게 신체적인 불편함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구분 짓는다면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청력의 손실이 있느냐 그렇지 않냐를 기준으로 구분 짓는다. 하지만 '장애인'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신체적 결함에 치우쳐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한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 같은 정의가 어쩌면 더욱더 차별을 유발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사회적인 시선이 생겨나면서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해서 부족한 인간이 아니라 남들과 똑같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자 <들을 수 있는 사람=청인>과 <볼 수 있는 사람=농인>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즉, 청인은 음성언어를 사용하며 소리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농인은 시각언어를 사용하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말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하! 나는 의학적인 판단에 따라 청각장애인 판정을 받았어. 그래서 청각장애인인 것은 확실해! 그리고 청각장애인이 아닌 비장애인을 청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구나!"
하지만 의문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수어를 배우지 않아서 손으로 말하지 않는데.. 나도 들리고 말로 소통하는데.. 나는 뭐야..?"
2. 농인과 구화인
목발을 사용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는 지체장애인이 있는가 하면 목발이나 전동휠체어를 써야 하는 지체장애인이 있는 것처럼 같은 장애의 분류에 포함된다 하더라도 저마다 장애정도가 다르다. 그런 것처럼 청각장애인이라고 해서 모든 청각장애인들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수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청각장애인은 청력의 정도에 따라 의사소통 방법이 달라진다. 잔존청력이 없어서 음성언어가 익숙하지 않았고 그래서 음성언어 대신 한국수어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수어가 제1언어가 되어 눈과 손으로 소통하는 것과, 잔존청력이 약간 있어서 보청기나 인공와우와 같은 의학기기를 활용하여 들을 수 있었고 음성언어도 자신이 들리는 만큼 구사할 수 있으며(대체로 잘 들릴수록 음성언어를 잘 구사하는 편이다 그러나 전혀 들리지 않더라도 어릴 적부터 말하기 훈련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듣고 말할 수 있다는 이유로 수어를 배우지 않아서 음성언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의사소통의 방법에 따라 청각장애인은 두 분류로 나뉘는데 전자의 경우를 농인이라고 부르며 후자를 구화인이라고 지칭한다. 이에 따라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럼 나는 수어를 모르고 입모양으로 소통하는 사람이니까 구화인이겠네?"
앞서 살펴본 용어들의 지칭 기준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특성에 기인한 것이다. 장애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지칭되고, 어떤 의사소통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농인과 구화인으로 구분 지어 지칭하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이 수어를 모르며 구화로 소통하는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에 구화인이라고 지칭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구화인이라고 대답해도 틀린 답은 아니지만 나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2. 본인에게 어떤 농정체성이 있느냐
농정체성이란 스스로를 청각장애인으로서 얼마나 이해하고 자신을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것이다. 농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고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농정체성이 형성된다. 누군가는 자신을 청인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본인은 완전한 농인이며 청인이란 배척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기도 하며 누군가는 스스로를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처럼 어떤 환경을 거쳤느냐에 따라 스스로를 정의하는 바가 달라지고 농정체성에 대해서 다양한 연구자들의 연구가 이뤄지는 만큼 수많은 정체성의 종류가 존재한다.
(참고로, 김명희 저자의 [청각장애인의 농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관한 탐색적 연구 : 청각장애 관련 기관 및 단체의 이용자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참고한다면 농정체성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막상 다양한 농인들을 만나보니 농인과 구화인을 의사소통의 방법이 아니라 어떤 정체성을 가지냐에 따라서도 다르게 정의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했다.
상황 1. 의사소통에 따라
"당신은 농인인가요?"
"저는 구화인입니다 수어를 잘 못해서요"
"당신은 구화인인가요?"
"아니요 저는 수어를 쓰는 농인입니다"
상황 2. 농정체성에 따라
"당신은 농인인가요?"
"아니요! 나는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사람들하고는 다르죠! 구화인입니다!"
"당신은 구화인인가요?"
"아니요! 수어도 모르는 이들이랑 다르죠! 나는 농인입니다!"
이와 같이 서로의 의사소통 방식이 다르다는 것에서 기인한 깊이 있는 소통의 부재는 또다시 서로를 가르게 만든다. 그리고 정말 단순히 수어보다 구화로 의사소통할 때 더 편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구화인이라고 대답하는 것과, 말도 못 하는 농인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담아 구화인이라고 대답하는 것에는 같은 단어여도 꽤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런 본인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굳이? 그냥 본인이 불리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뭘 그렇게 따지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당신에게 하나의 가정을 해보겠다.
어느 조각나라에 나무조각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모두가 동그란 형태의 동글동글한 나무조각들이다. 어느 날 조각나라에 세모 모양의 나무조각이 생겼다. 동그라미 조각들은 이를 보고 '너는 나랑 모양이 다르네? 특이하다 우리는 동그라미라고 부르니까 너희는 세모라고 부르면 되겠다!' 라며 이름을 지어줬다.
그러나 동그라미와 세모가 늘 잘 지내는 것은 아니었다. 동그라미는 굴러갈 때 그냥 구르기만 하면 되지만 세모는 동그라미처럼 구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나무조각이지만 서로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동그라미와 세모는 서로 잘 지내기도 하고 그렇지도 않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세모 조각들 사이에서 새로운 세모가 생겨났다. 이 세모는 아주 작은 동그라미를 끼울 수 있는 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래쪽에 있는 홈에 동그라미 조각을 끼우면 동그라미처럼 구를 수 있었다. 세모들의 모양은 미묘하게 달랐지만 어쨌든 이름은 똑같이 세모였다. 하지만 세모들은 굴러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다르게 부르며 다른 취급을 했다.
그런 세모들을 바라보면서 동그라미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동그라미 조각이 보기에는 이러나저러나 모두 똑같은 세모인데 말이다.
만약 동그라미와 세모가 서로 편 나눠서 싸운다면 조각나라를 바라보는 당신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어떤 모양을 가졌고 어떤 색깔을 가졌든 똑같은 나무조각인데 왜 싸우지..?'
결론은, 구화인이든 농인이든 어떤 용어로 스스로를 칭할지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칭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를 칭하는 이면에 '나는 어딘가 모자란 너와 다르지'와 같은 우월감이 담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구화인이든 농인이든 결국은 같은 청각장애인이고 청각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결국은 같은 인간이다.
과거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불편함이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비정상인'과 '정상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다. 신체적으로 어떠한 불편함이 없어야만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시선을 담은 이 용어는 현대에 들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장애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개선되는 사회적 분위기와 올바른 용어 사용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들을 통해서 많이 사라진 추세다.
이처럼 어떤 말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상대에 대한 인식이 담기는 만큼 우리는 스스로를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칭해야 하는 것인지 찬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과거에는 청각장애인이지만 안 들리는 것도 아니고 잘 들리는 것도 아니고 애매한 위치에 서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청각장애인으로 살면서 수어를 배우고 농인과 청인에 대한 개념들을 하나 둘 배워나가며 많은 비장애인과 청각장애인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점차 수어와 농사회에 대해서 눈뜨기 시작했고 내가 누구인지 하나씩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들리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리고 수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음성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구화인도 아니고 농인도 아니고 어중간한 인간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사용하는 의사소통의 방식이나 청력의 잔존여부를 떠나서 나는 세상을 눈으로 보는 것이 더 편한 '보는 사람'이다. 소리와 세상을 눈으로 보는 사람으로서 나는 농인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