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진실로 전도되는 윤리적 놀이-'트랩'

덫에 걸린 자가 아니라, 덫을 완성한 자에 대한 비평

by 진주


1.재판이라는 놀이: 생존을 위한 의례와 연출의 절제력

연극 <트랩>은 겉으로는 사법적 구조를 차용하지만, 죄를 판단하거나 정의를 추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우연한 교통사고로 은퇴한 법조인들의 공간에 들어온 남자 트랍스는, 그들의 재판 놀이에서 진짜 피고가 된다. 쇠약하고 병든 육체를 가진 노년의 인물들에게 재판은 더 이상 사회적 실천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감각을 유지해주는 놀이이며, 일종의 자기존재 유지 장치다. 그들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순간은 죽은 위인을 끌어와 허구적 재판을 벌일 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놀이'의 대상이 되었을 때이다. 따라서 놀이의 본질은 권력의 재현이나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삶을 다시 불태우려는 무력한 생의 충동에 가깝다.



이들의 재판은 만찬이기도 하다. 집사 역할로 등장하지만 광대 같은 복장을 한 시모네는 피아노 연주로 배경음악을 깔고, 각 코스 요리를 제공하며 장면을 구분한다. 재판이 외국어로는 만찬의 의미도 가진다는 점에서, 이 놀이는 까마귀 같은 노인들에게 삶의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블랙코미디다. 죽음에 가까운 이들이 타인의 죄를 먹고 사는 이 구조 속에서, 트랍스는 처음에는 사냥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의 덫은 외부에서 설치된 것이 아니라, 놀이 속에서 점차 형성되는 내적 구조다.



이 세계관이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이유는, 작품이 설명을 최소화하고 무대적 디테일과 장면 설계만으로 의미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특정 시대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소품으로 등장하는 차량 모델과 시대착오적 발언을 통해 이들의 시간대가 현재와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피고로 끌려온 트랍스가 별다른 저항 없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장면은, 인물의 배경·역할·성격 구조를 설명 없이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변호사의 과장된 억양이나 사형집행인의 과도하게 화려한 의상은 인물들이 품고 있는 결핍과 기만을 불필요한 대사 없이 드러낸다. 이 연출 방식의 핵심은 '보여주기'와 '생략' 사이의 정확한 거리감에 있다. 즉, <트랩>은 관객이 해석의 빈 공간을 채우도록 설계된 작품이며, 바로 그 점이 군더더기 없는 연출의 미덕이 된다.



이러한 절제는 하수민 연출가다운 방식이다. 많은 작품이 정보 전달을 위해 설명적 대사를 사용하거나 장면을 과밀하게 구성하는 것과 달리, <트랩>은 오히려 설명의 부재를 통해 미세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연출가의 이전 작업들을 떠올렸을 때도 이 작품은 특히 '불필요한 것을 과감히 비워낸 상태에서 서사와 상징을 성립시키는' 연출의 정제를 보여준다.



2.트랍스의 자기 수행: 놀이가 진실로 전환되는 순간과 덫의 주체 전도

트랍스가 처음 재판에 참여했을 때 그는 억울함을 호소한다. 사고로 이곳에 들어왔을 뿐이며,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그는 점차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은폐되어 있던 욕망과 의도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내심 경쟁자를 밀어내고 싶었던 마음, 그와 얽힌 사적인 관계, 무심코 흘린 말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작품은 법적 사실의 측면보다는 그가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인식해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이 과정은 배우의 표정 변화, 말이 멈추는 호흡, 침묵의 길이 같은 비언어적 디테일로 섬세하게 설계되어 있다. 트랍스는 경쟁자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순간 말을 멈추고, 처음에는 거짓말로 둘러대다가 결국 진실을 말한다. 이 공방 속에서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긴장을 가리려 하지만, 그의 손은 떨리고 목소리는 갈라진다. 누가 봐도 가려진 것이기에 관객들에게 더 불안한 느낌을 준다. 감정이 폭발하거나 장면이 격앙되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부끄러움이 인식되는 순간이 관객에게 생생히 전달된다. 그가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은 처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놀이가 갑자기 현실의 무게를 띠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가 스스로 사형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일종의 의례처럼 연출되며, 처벌이 아닌 자기 인정의 계기로 작동한다. 이 지점에서 죽음은 타자에 의해 강요된 운명이 아니라, 놀이를 넘어서기 위한 자기 수행의 종결이 된다. 비극을 만찬처럼 소비하던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트랍스만이 자신의 진실을 진지하게 마주한다. 블랙코미디의 구조가 역전되는 순간이다.



결정적으로, 트랍스의 자살 이후 남겨진 인물들의 반응은 이 작품의 핵심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노인들은 죽음이 현실로 성립해버린 순간 혼란에 빠진다. 자신들의 게임이 더 이상 보호된 놀이가 아니게 되었음을 깨닫고, 오히려 놀이가 망가졌다고 탄식한다. 반면, 그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시모네는 그것을 "비로소 자신의 진실에 도달한 행위"로 바라본다.



시모네는 무대장치에 가깝지만, 표정이 사라진 트랍스에게 질문을 던지는 등 관객들이 하는 생각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연극을 연극답게 만드는 장치라는 점에서 외부의 시선을 대변하고, 그렇기 때문에 관객을 상징한다. 단 두 줄의 발화를 통해 놀이의 규칙이 해체되고, 덫의 주체가 뒤집히는 이 장면은 이 연극이 가진 서사적 설계의 정교함을 극대화한다. 처음에는 사냥감으로 등장했던 트랍스가, 결국 이 세계의 유일한 실재적 행위자이자 덫을 완성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트랩>의 덫은 타인이 설치한 것이 아니다. 타인의 놀이 속에서 자기 진실을 외면하는 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붙잡히는 순간 형성되는 내적 구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의 주제는 죄나 처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진실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라는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향한다.



3. 침묵이 만드는 사유의 공간

<트랩>은 죄를 판단하지 않고, 구원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 작품은 인간이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철저히 보여주고, 그 순간이 무너지는 지점을 기록한다. 놀이는 진실을 유예하는 장치였고, 그 진실에 도달한 인물은 오히려 놀이를 파괴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완성했다. 이 서사적 전환은 감정적 과잉이나 장식적 장면 없이 이루어지며, 그 절제가 오히려 깊이를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연극 형식 자체에 대한 성찰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노인들의 재판 놀이는 일종의 메타연극이며, 시모네는 그 연극성을 가시화하는 장치다. 트랍스의 죽음은 연극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자, 동시에 연극이 비로소 진실해지는 순간이다. 관객은 이 이중구조 속에서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것이 허구인지 진실인지, 놀이인지 의례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다. <트랩>은 설명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단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 속에서 관객은 의미를 발견하고, 해석을 수행하게 된다.



덫은 그들을 위해 설치된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것을 최소한의 무대 언어로 최대한의 사유를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구현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트랩>은 단순히 잘 만든 연극이 아니라, 희소한 방식으로 정확하게 구축된 작품이 된다. 우리는 트랍스가 완성한 덫을 목격했고, 이제 각자의 진실 앞에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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