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상상할 자유, 춤출 자유

[Reveiw]연극'히스테리 앵자이어티 할머니'

by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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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편화된 개인사와 공감 가능한 보편성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는 2막 구성의 작품으로, 1막에서 6명의 배우가 각자의 이름을 단 배역을 맡아 삶의 순간들을 분절적으로 펼쳐낸다. 이 1막의 표현 방식은 두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첫째, 각 장면이 개인적이면서도 공감 가능하다는 점이다. 둘째, 그 장면들이 파편화된 형태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 각 배우가 자신의 서사를 연구하고 대본화한 결과, 복장과 표현은 각본가의 유머와 어우러져 생동감 넘치게 구현되었다. 섬세한 대사는 물론, 배우들은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배경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자신이 했던 장면을 이어가거나, 재연되는 장면 속에서 각자 해석한 표현을 지속적으로 연기하며 무대 전체를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성이 과도한 사적 영역으로 침잠하지는 않는다. 늙음에 대한 고민, 히스테리 현상에 대한 차별적 정의, 부모의 재력, 청년 빈곤 등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이 작품을 관통한다. '어떤 여자들은'으로 시작되는 삽입곡,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연출가의 대사, 작품의 전체적인 톤을 종합할 때, 이들이 마주한 공감 가능한 고통은 크게 페미니즘과 자본주의라는 두 축으로 수렴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페미니즘과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이 두 주제는 자칫 교조적인 작품으로 흐르기 쉽다. 나는 상당한 경계심을 가지고 이 작품을 관람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삽입곡이 표현하듯 '아직도 있는 여자'를 '보는' 작품에 가깝다. 작품이 교조성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선언이나 구호 대신, 구체적 개인들의 일상적 순간을 통해 문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각 배우의 서사는 대의명분이 아닌 실존적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아직도 있는 여자들은 유해한 세상에서 무해한 연대를 하는 것조차 지쳐있다. 그래서 1막을 지배하는 것은 공허한 불안이다. 여기서 '공허한 불안'이란, 분노의 대상은 명확하지만(성차별, 자본주의의 모순)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연대를 외치지만 연대 자체가 또 다른 짐이 되고, 투쟁을 말하지만 이미 지쳐있는 이들에게 투쟁은 또 다른 의무가 된다. 작품은 이 딜레마를 분절적 형식으로 형상화한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 자본주의가 모순에 부닥쳤다는 것. 우리는 여기서 불공평함을 숨 쉬듯 느낀다. 하지만 긴 시간이 드러내는 인간의 조건—남자도 여자도 할 것 없이 늙는다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사실—은 그러한 분노와 연대만으로는 현실의 고난을 견뎌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분절적으로 연출된다. 각 캐릭터의 개성이 대비되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서로의 장면이 강렬함을 더하지만, 기본적으로 장면들은 연결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따로 존재한다. 이는 연대의 불가능성, 혹은 연대 이전의 고립된 개인들을 형식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노래 가사 중 내가 주목했던 것은 다양한 삶을 사는 여자들의 삶이 '불공평한가?'라고 되묻는 부분이었다. 단정에서 질문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수사적 기교가 아니다. '불공평하다'는 분노는 정당하지만 때로 우리/적의 이분법을 강화하고 연대의 범위를 좁힌다. 반면 '불공평한가?'라는 질문은 다양한 층위의 불공평함을 인정하면서도,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불공평함의 희생자이자 가해자일 수 있다는 복잡성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그 질문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주제들을 더 담담하게,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해체와 재결합의 과정을 모든 남자, 여자, 계급 속에 존재하는 '늙은 여자'—즉, 불안과 무력감을 경험하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과정의 고통스러운 해체가 1막 전반부와 중반부를 지배하며 파편화된 형식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1막 후반부, 2025년부터 시간이 흐르는 장면에서 지치고 늙은 여자들이 한데 모여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은 후자의 재결합을 암시한다.


2. 순진한 상상의 정치학

2막은 1막에서 모인 여자들이 벌이는 상상 연극에 가깝다. 사실 아주 순진한 상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연극을 계기로 노인이 되어서도 함께 연락하는 여섯 명의 배우. 십시일반 겨우 마련한 작은 보금자리. 서로 의지하지만 그렇게 끈적끈적하지도 않고, 끈적끈적하지 않다 해도 그들 사이에는 진심 어린 유대감이 흐르는 상태.


흥미로운 것은 이 상상에 가해지는 변주다. 부모의 재산과 투자로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던 유림이 사고로 죽으면서 이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나름대로 끈끈한 유대감을 유지하던 이들은 서로 양보하기는커녕, 조금이라도 더 상속받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 그런데 그 과정이 코믹하게 그려진다는 점이 특히 흥미롭다.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도,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도, 연출하는 방식도 그들을 추악하게 재단하기보다는 그냥 생기 있는 인간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인간의 욕망을 도덕적으로 단죄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균형 잡힌 시선이다.


결과적으로, 이미 먼저 죽은 것으로 설정된 배우가 '서로가 더 행복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 연대해야 함을 말하며 갈등은 종료된다. 2막의 연출 방식에서 가장 인상 깊고 따뜻했던 것은 처음과 마지막 장면을 거의 비슷하게 반복하여 삽입했다는 점이다. 두 장면 사이에는 유림의 재산을 둘러싼 갈등과 실제로 유산받은 재산이 놓여 있는데, 그 누구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고 여전히 서로에게 커피를 타준다. 이것은 연출가가 꿈꾼 '약간 낙관적이지만' 현실적인 미래다.


이 낙관적 결말을 두고 '구조적 문제를 개인적 해결로 봉합한다'는 비판이 가능할 수도 있다. 자본의 불평등과 계층 간 격차는 그대로인데, '함께 커피를 마시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충분한가?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이미 지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혁명이 아니면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라 지금 가능한 생존의 방식이다. 상상은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것은 물질적 자원만이 아니라 '다른 삶을 상상할 권리' 자체다. "이렇게 살 수도 있다"고 무대 위에서 선언하는 것, 늙어서도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꿈꾸는 것 자체가 현실에 대한 저항이다. 완벽한 해결책 없이도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 자체가 이들이 선택한 연대의 방식이며, 연극이 줄 수 있는 진심 어린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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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히스테리의 재전유와 현대판 굿판

이 작품을 보고 나는 제목을 머릿속에서 계속 굴려보았다.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라는 제목은 각 단어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히스테리하고 불안한 여자가 한을 풀 듯 춤을 춘다는 것인가?


먼저 '히스테리'라는 용어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히스테리는 여성의 감정을 병리화하던 의학적 용어였다. 19세기 이래로 여성의 분노, 불안, 저항은 '히스테리'라는 진단명으로 억압되고 무력화되었다. 작품이 이 용어를 제목에 당당히 배치한 것은 일종의 전복 전략으로 읽힌다. 과거에 억압의 도구였던 언어를 여성 스스로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언어로 재전유하는 것이다. '앵자이어티(불안)'와 함께 나열됨으로써, 이 단어들은 병리가 아닌 정당한 감정 상태로 재해석된다.


처음 극장에 들어갔을 때 받았던 시각적 인상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굿판이라도 보이는 것처럼 알록달록한 천이 잔뜩 매달려 있었고, 배우들은 부분적으로 한복을 입고 있었다. 내 초기의 직감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던 것 같다. 2막의 의도를 고려할 때, 이 작품은 제작진이 보내는 '굿판'이기도 하다.


굿판이란 한국 전통 무속 의례에서 한을 풀고 넋을 위로하는 의식이다. 이 작품은 한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자들에게 정성을 들여 '연극'을 통해 위로를 건네는 현대판 굿판이다. 이것이 '춤추는'의 의미이며, 그 춤을 추는 주체가 '히스테리'하고 '앵자이어티'한 '할머니'들이라는 점(배우들이 실제로 늙었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모두 결국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이 각 단어가 나열된 의미이기도 하다.


영어 제목에는 중간에 'and'가 붙어 있던데, 중의적인 표현을 의도했더라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주체의 속성(히스테리하고 불안한)보다는 그 앞에 실재하는 여자들 자체였던 것 같다. 형용사가 아닌 존재 자체를 보려는 시도. 이것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윤리적 태도다.


4. 성취와 한계 사이에서

이 작품의 성취는 페미니즘과 자본주의라는 자칫 경직될 수 있는 주제를 개인의 생생한 서사와 유머로 풀어냈다는 데 있다. 각 배우의 몸과 목소리를 통해 추상적 담론이 구체적 삶으로 번역되었고, 분절적 형식은 연대의 불가능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사유하게 만들었다.


굿판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죽은 자를 살리지도, 한을 완전히 풀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굿판을 벌인다. 왜냐하면 위로 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혁명적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은 연극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을 오해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창한 해답이 아니라, 함께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커피를 나누는 그 시간 자체다. 히스테리하고 불안하지만 여전히 춤추는 할머니들. 그들이 만들어가는 불완전하지만 진심 어린 연대의 순간들. 이 작품은 그 순간들을 무대 위에 정성스럽게 펼쳐 보이며, 관객 각자의 삶 속 '늙은 여자'를 발견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훌륭한 '굿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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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해결책 없이도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 자체가 이들이 선택한 연대의 방식이며, 연극이 줄 수 있는 진심 어린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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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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