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향 웹소설에 대한 단상
여성향 장르를 규정하는 세 가지 구조적 법칙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한 서사적 장치를 넘어, 현대인의 결핍이 투사된 자발적 유폐의 도면이다.
1. 완벽한 타자들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공전할 것.
2. 장르 연명을 위해 사랑의 결정을 무한히 유예할 것.
3. 주인공은 타자를 해체하는 ‘공감 기계’로 군림할 것.
이 세계의 주인공은 여러 타자를 거느리면서도 결코 단일한 관계에 투신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의 파편화된 상처를 인격의 정수인 양 ‘공감’하고 반사하며 사랑을 획득한다. 여기서 ‘이해’는 정서적 교감이 아닌 지배의 도구로 전락한다. 타자는 주인공의 현실 불안을 상쇄할 ‘감정적 안전 자산’으로 박제되며, 그들이 보이는 집착은 ‘이해받은 자의 보전’이라는 명목하에 주인공의 통제 아래 놓인다.
‘빙의’나 ‘게임’이라는 메타픽션적 설정은 이러한 기만성을 정당화하는 장치다. 주인공은 오직 주체에게 복종할 대상만을 획득하기 위해 해당 세계에 거주한다. 서사 속에서 반복되는 주인공의 고립감과 자기비하는 타자를 극적으로 견인하기 위한 기능적 장치에 가깝다. 이를 통한 관계 형성은 성장이 아닌 안전한 퇴행, 즉 자아의 축소를 지향한다. 타인의 상처를 읽어내어 정의하는 행위는 구원이 아닌 거만한 지배의 일종이다. 무한한 이해력이라는 수술대 위에서 타자는 자아를 거세당하고, 오직 주체의 승인만을 갈구하는 대상으로 변모한다.
이는 파놉티콘의 시선과 맞닿아 있다. 주인공은 독자의 위치에서 남캐의 결핍을 선험적으로 관찰한다. 시선의 비대칭성 속에서 타자는 자신의 핵심을 저당 잡힌 채 전시될 뿐이다. 장르물 속의 ‘집착’ 역시 타자의 자유를 압수하여 주체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이기적인 생존 계약의 산물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집착한다”는 수사 뒤에는 “타자의 주체성을 소거하여 내 불안을 잠재우겠다”는 계산이 작동한다. 그 끝에 도달하는 종착지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외부 세계를 차단한 자궁 속 같은 폐쇄적 관계다.
유아적 욕망과 장르적 형식을 위해 대중은 이 기만에 동참한다. 종잇조가리 같은 타자의 심연 위에서 수심을 재는 행위를 사랑이라 명명하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소설의 자기기만은 주인공의 무지함이나 가련함 속에 은닉되어 주체의 독재적 면모를 은폐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의 얼굴 위로 독자의 민낯이 투영된다. 지루하고 평범하며, 때로는 비겁한 조연의 얼굴. 그것이 우리의 실제 주소다.
결핍을 메워줄 완벽한 안전장치로서 이 소설들은 기능한다.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부와 육체와 마음을 무조건적으로 투항하는 타자들을 보며, 독자는 상처받지 않을 안락을 향유한다. 만약 이들을 실존하는 인간으로 간주했다면 이는 폭력이겠으나, 환상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주체는 창조물을 난도질하며 쾌락을 얻는다.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구역질은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왜 이 조악한 낙원에 기생하는가. 현실의 타자가 주는 상처가 실존을 위협할 만큼 비릿하여, 가공된 온기에라도 기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서글픈 허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타인과 부딪히는 고통을 생략하고 싶다는 비겁한 생존 본능을 온전히 비난하기는 어렵다.
독자는 이 세계가 유아적 망상의 투사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 그럼에도 ‘읽기’라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묘한 불쾌감을 감수하며 비겁한 대가로 달콤한 과실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진실에 대한 향수병’으로 정의될 수 있다. 가공된 설탕물을 들이켜면서도 혀끝에 남는 씁쓸한 역겨움. 그 구토감을 통해 “나는 아직 이 조작된 낙원에 완전히 침식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실재의 감각을 기억한다”고 온몸으로 저항하는 셈이다.
나르키소스는 완벽한 자신을 사랑하다 파멸했으나, 현대의 독자는 스마트폰의 검은 화면 위로 떠오르는 꾀죄죄한 얼굴을 마주한다. 나는 검은 화면 속의 자신을 조소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못난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이 글들을 읽길 원한다. 이 조악한 거울을 통해서라도, 끝내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의 ‘진짜 얼굴’은 우리가 건져낼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진실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