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기억은 눈으로 덮인 새하얀 시골 마을.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있던 우리 집은 그 근방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듬성듬성 자란 나무를 경계로, 저만치 아래에는 쫙 펼쳐진 논밭들과, 연기가 폴폴 나는 초가집, 그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과, 건너편의 산, 산, 산. 우리 산과 저쪽 산 그사이를 가로지르는 좁은 도로, 도로를 낀 집에서 길러지고 있는 소들, 돼지들까지 모두모두 보였다. 세상을 백지로 되돌릴 듯이 하얗게 하얗게 눈이 펑펑 내렸고, 내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와 집 앞 공터에서 눈을 굴리며 아주 못생긴 눈사람을 만들었다. 멀리서 누군가 논두렁을 가로지르며 걸어가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새까맣게 마른나무에 기대어 팔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다. 안녕! 안녕! 까만 인영도 나를 마주 보고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린다. 팔들이 반짝반짝, 펄펄 흔들린다. 안녕! 안녕! 내가 다섯 살 무렵의 일이다.
기억은 결국 시간이 갈수록 바스러지고 조각조각 나서 흩어지게 마련이다. 그 조각들은 마음에, 머리에, 온몸에 흩어져 나를 이루지만 대게는 그걸 인지하지 않고 산다. 물론 갑자기 나란 존재가 현재에 뚝 떨어져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나의 과거는, 기억은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다. 나를 나로서 지지하는, 내 과거라 부르는 것들은 아직 채 사라지지 않은 기억의 덩어리들이다. 단단하게 뭉쳐서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기억부터, 영문도 모른 채 단지 인상으로서 존재하는 기억, 기록의 힘을 빌려 겨우겨우 형태를 유지하는 -어쩌면 변형 됐을지도 모르는- 기억 등등이 나를 받치는 기둥으로서 존재한다. 기억 덩어리는 대게 파편이며 불연속적이다. 한 시절이나 하루에 묶이는 기억조차 그렇다.
예를 들어 학창 시절 소풍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자. 분명 매년 다녀왔을 소풍이건만, 나만해도 소풍의 기억은 초등학교, 중학교 때뿐이다. 몇 살이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학교 근처의 산, 모여있는 아이들, 혼자 먹는 도시락, 반짝이는 돗자리와 개울물, 아이돌 노래에 맞춰 장기자랑을 하는 아이들, 소리 지르는 선생님. 이 것들은 하나의 장소, 하나의 시간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일어난 소풍이란 에피소드가 겹겹이 겹쳐 ‘소풍’이란 하나의 덩어리가 된 기억이다. 이렇게 기억에는 가끔 묶어주는 이름표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래서일까,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묶이는 기억에는 대체로 꽤 굵직굵직한 기억덩어리들이 내 몸 한 구석에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그런데 직장인(혹은 취준생)이라는 타이틀이 내 이름 앞에 붙은 이후, 즉 20대 중반 이후부터는 내 기억의 덩어리들이 좀체 단단히 굳어지지 못했다. 기억이 있더래도 언제 적의 기억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직장인이란 이름이 너무 많은 시간을 포괄하기 때문인 듯하다. 어른이란 말이 아이가 아닌 모든 시간을 싸잡아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럴 때에는 이제, 기억을 묶어주는 이름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된다. 다른 게 필요해진다. 다름 아닌 기억을 읽어주는 사람. 나와 함께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했던 기억의 공유자.
비어버린 기억은 어떻게 될까. 어디로 갈까. 기억과 기억사이. 그것은 크레바스처럼 기억과 기억이 어긋나 찢어진 틈일 수도 있고, 대륙과 대륙사이, 도무지 연속적이라고는 볼 수 없게 세계선을 가로지르는 망망대해일 수도 있다. 이 비어버린 곳은 영원히 공란으로 남는 것일까. 여기에 그 나레이터들이 힘을 발휘한다. 나의 첫 기억에는 실은, 엄마의 나레이션이 붙어있다.
“눈이 엄청 많이 왔지, 그날... 앞에서 눈 사람 만들면서 놀다가, 마침 아래에 재영이네가 걸어가는 거야. 네가 먼저 발견하고 가서 손을 흔들었어.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너를 금방 알아보더라.”
내가 기억하는 건 그저 아주 하얗고 하얀 동네. 풀풀 내리는 커다랗고 하얀 눈송이와 까만 점 같은 인영이 논두렁을 가로질러가던 이미지. 아주 짧은 쇼츠같은 기억에 엄마의 설명이 더해지자 이미지와 이미지가 연결이 되더니 재생가능한 영상이 되고, 소리가 붙는다. 그렇게 기억은 완성이 되어 마침내 덩어리를 이루고, 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억은 아주 오래간다.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파도에 바위가 닳아가듯 아주 느리고 느리게, 사라지는 줄도 알 수 없이 천천히 녹아 피와 되고 살이 된다. 어린 시절의 향수로써.
대부분의 삶을 혼자로 살아온 나는 내 청춘 전반, 많은 시간에, 기억에 구멍이 있다. 내 기억을 복기해 줄 나레이터들의 절대수가 부족한 탓이다. 그렇다 보니 내 기억의 밀도는 주로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집중되어 있다. 내 기억의 공유자는 엄마와 동창 몇 명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다. 고양이도 있지만, 슬프게도 고양이는 말을 하지 못한다. 다만 변하지 않는 눈빛으로만 우리가 함께해 온 시간이 변함없이 한결같다고 전해올 뿐이다.
딸이라면 아마도 엄마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것이다. 우리 엄마도 자주 내게 옛이야기를 했고, 한다. 엄마는 오래 불행했던 사람이었다. 엄마의 행복은 모두 오래된 과거에 있었고, 다행히 나는 그 행복의 끄트머리에 태어났기에 엄마가 자주 반추하는 행복에서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몇 가지 뭉쳐낼 수 있었다.
내 유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와 나의 기억은 많이 다르다. 분명 같은 시간에 함께 있었지만, 엄마는 지금 나보다도 어린 어른이었고, 행복과 불행이 겹친 불안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막 깨닫기 시작하는 어린애였고 모든 것이 신기했으며, 불행이라는 말도 뭔지 몰랐다. 우리는 동시간대의 같은 장소에서 함께 있었고, 함께 웃었지만 기억의 응결핵이 달랐다. 세상이 하얗게 지워져 가던 그날, 아빠는 부재중이었다. 그렇기에 엄마에게는 그날은, ‘그럼에도 아름다운 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눈이 오는 데도 난 하나도 춥지 않았었는데, 엄마의 행간에서 어린 딸아이가 춥지 않게끔 가장 두꺼운 겨울옷을 빈틈없이 입혔을 엄마를 상상할 수 있다. 덕분에, 다행히 우리는 어긋난 위치와 다른 높낮이의 시선을 가지고도 행복을 더 풍성하게 추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른 관점이 언제나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늘 나보다 조금 더 불행한, 스스로의 연민에 갇힌 시선에서 나와 사건을 바라봤다. 세상은 엄마를 몰아갔고 엄마는 강한 자책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기 연민을 키운 사람이었는데, 그걸 분출할 대상이 또 하나의 자신인 딸, 바로 나였다. 나는 그런 엄마를 닮아가며 자책과 피해의식 갇힌 시선으로 나와 모두,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령 나는 즐거운 모험이었던 기억이, 엄마에게는 나를 잃어버려 정신없이 길을 헤매고 통곡했던 기억이 되고, 엄마의 기억으로서 나는 철없이 아무 사람집에서 잠이나 잔 바보가 되었다가, 나를 그렇게 방치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샌가 모녀는 닮은 관점을 갖게 되었지만, 몸이 달라서, 엄마와 딸이라서 같으면서 다른 기억을 갖게 되었다. 그건 마치 하나의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찍는 카메라와 비슷하면서도, 나아가 같은 컷을 사용해 장르도 감독도 다른 영화를 찍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영화는 내 머릿속에서만 상영되었고, 엄마의 설명은 기억을 확장시킴과 동시에 엄마를 원망하고 나를 더 서럽게 만드는 데 쓰였다.
8살, 여름방학 무렵. 나와 엄마는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아빠가 마련해 준 2층 단칸방에서 단 둘이 살게 되었다. 그 사이 부모님은 나에게 말도 없이 이혼 도장을 찍었다. 갈라선 두 남녀는 아무래도 다시 만날 일이 없는 게 좋은데, 엄마는 미련이 많았던 모양이다. 마침 내 존재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였다. 가을쯤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나를 앞세워 초상을 치르러 갔다. 그때엔 장례식장이 따로 없었고, 그냥 바로 그 시골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꽃상여가 들어왔고, 동네 사람들이 한 번씩 들렀다. 대청마루에 영정사진을 올려놓고 제사상이 차려졌다. 삼베로 만든 상복을 걸친 아버지와 그 형제들은 그 앞마당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하루 종일 아이고 아이고 하고 울었다. 엄마는 한집 식구처럼 부엌에 들어앉아 하루 종일 음식을 날랐다. 나는 멀뚱멀뚱 앉아서, 과자를 먹고, 차려진 음식을 몰래 집어 먹고, 아빠를 따라서 우는 척을 하다가 잠을 잤다. 3일 만에 할아버지를 묘지에 모시고, 비석을 세우고, 조문객들마저 모두 돌아간 다음 날 아침. 엄마는 친척들과 싸웠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죽음은커녕, 어른들의 대화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할머니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길을 걸었다. 산속 깊은 깡촌, 하루에 다니는 버스는 세대뿐인 곳. 시내로 가는 버스정거장까지만 해도 15km가 넘는 거리를 고집을 부리며 나선 것이다. 아빠가 차를 끌고 따라와 계속 타라고 권하다가, 결국 욕을 퍼붓더니 떠나갔다. 점점 작아지는 아빠 차뒤꽁무니를 보며 나는 엄마 손에 질질 끌려갔다. 걷고 싶지 않은데. 아빠 차 타면 안 돼...? 그때 마침 옆에 스쿨버스가 한 대 섰다. 내가 전학 가기 전까지 매일 타고 다니던 버스였다. 그 버스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는 얼굴이었다. 같은 동네, 같은 반 아이들의 얼굴. 기사아저씨도 아는 얼굴이었다. 버스정류장까지 태워줄 테니 타라며 문이 열렸다. 엄마도 진짜 걸어갈 생각에 막막하긴 했었나 보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우리를 읍내까지 태워다 주었다. 나는 그대로 다시 예전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내가 가야 할 학교는 시내에, 한 학년당 반이 20씩은 되는 커다란 학교였다. 엄마와 나는 감사 인사를 하고 읍내에 한 대뿐인 택시를 탔다. 목적지는 내가 가야 할 학교였다. 나는 사실 그때까지도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을 알아챈 건 택시에서 내리고 난 뒤였다.
시간은 이미 9시가 한참 지나있었다. 초등학생 만 명가까이를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운동장은 텅텅 비어있고, 학교 앞에 줄 선 문구점들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엄마는 날 교문 앞에 그냥 내려둔 채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나는 8살이었고, 지각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 내가 배운 거라곤 틀리면 혼나고, 맞는다는 단 하나의 공식뿐이었다. 이미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시골에서 전학 온 데다 집안사정마저 변변찮은 날 여러 번 때린 전적이 있었다. 나는 교문에서 제일 작은 문이 달린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3교시와 4교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술시간이었다. 가방에는 준비물로 파란색 마분지와 탈지면이 잔뜩 들어있었다. 무얼 만들지도 이미 생각해 두며 가방을 챙길 때부터 엄청 들떠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마 엄마도 몰래 버려지게 될 터였다. 난 겁쟁이 었고, 바보였고, 울보였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게 싫었고, 무서웠고, 한창 수업중일 교실 문을 아무렇지 않게 열고 들어가 60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주목을 받을 자신도 전혀 없었다. 문구사 사장님들이 물었다. ‘너 왜 이러고 있니’. ‘혼날까 봐요..’. 나는 집에 돌아가도 엄마에게 혼날까 봐 어디에도 가지 못했다. 다른 곳에 갈 생각조차 못했다. 하굣길에 학교에서 빠져나오는 아이들 틈에 섞여 하교해야만 엄마가 모를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화내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고, 그다음으로 무서운 게 선생님이 화내는 거였다. 가끔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학교밖으로 숨었다. 아이들이 나를 볼까 봐.
종이 울리는 간격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8살에게 2시간은 정말 정말 긴 시간이었다. 다리가 저리면 일어나고, 발이 아프면 다시 쪼그려 앉으며 버텼다. 빨리 하교하는 아이들에 파묻혀 아무렇지 않은 척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였다. 어떤 아저씨가 내 앞에 다가와 물었다. ‘너 왜 이러고 있니.’ 우물쭈물 대자, 건너편 문구사 사장님이 대답했다. ‘지각했는데 혼날까 봐 못 들어가고 있대요.’ 아저씨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조금 마른 체형이었다는 걸 제외하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아저씨가 그 당시엔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였다. 큰 건물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교실까지 걸어가면서 아저씨는 자세한 사연까지는 묻지 않았던 것 같다. ‘몇 학년 몇 반이니?‘ ’ 1학년 16반이요...‘ ’ 이름은 뭐니?‘ ’ 박혜은인데요..‘ 복도는 적막했다. 분명 교실마다 선생님들이 하나씩 다 말씀을 하고 계셨겠지만 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아저씨는 손이 무척 크고 거칠었으며 따뜻했다.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큰 건물에 맞게 쭉 펼쳐진 긴 회색 복도. 여기에 오는 게 그렇게나 무서웠는데, 아저씨가 나를 꽉 붙들어주고 있으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아저씨는 교실문을 아무렇지 않게 두드리고, 이내 열기까지 했다. 난 그게 그렇게나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어른이 그렇게 든든해 보인 건 처음이었다. 곧 선생님이 나와 아저씨와 무엇인가 이야기했다. 나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선생님에게 변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오히려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반아이들을 돌아보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해놓고선 혼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취해 아저씨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못 드렸다. 그동안 날 유독 미워하는 것 같던 선생님이 그날만큼은 나에게 굉장히 상냥하게 대해주셨던 게 떠오른다. 그 일 때문인지 그 이후로 선생님은 날 그렇게 혼내진 않으셨다. 내가 별로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좀, 측은해 보였 나보다.
아무튼 나는 친절한 아저씨 덕분에 제일 좋아하는 미술시간 직전에 입실했고, 진작부터 상상해 두었던 솜을 덕지덕지 붙여 만든 눈사람을 완성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평소보다 더 과장된 목소리와 말투로 내게 관심을 집중해 주셨는데, 조악한 그림마저도 너무 멋지다며 ‘앞 문 위에 붙여도 되겠네.‘라고 하셨다. 바보였던 난 그걸 철썩 같이 믿었고, ‘언제 붙여 주시는 거예요?’라고 눈치 없이 물었다가 정말 그 해 내내 그 파랗고 하얀 못생긴 그림이 교실 위에 걸려있게 되었다. (사실 나는 선생님의 표정으로 ‘얘가 진짜 해달라고 하네.’라는 걸 읽었었고, 그 덕에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라는 걸 배웠다. 그래도 그림이 걸려있는 게 기분이 좋아서 일부러 모른척했다.)
아무튼 난 그날 다행히 기분 좋게 귀가할 수 있었다. 물론,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혼날까 봐. 나는 혼나는 게 무서워서, 엄마가 조금이라도 눈썹을 부라리면 얼른 숨어버리는 어린애였으니까. 대신 자랑은 했다. 내 그림이 교실 앞문 위에 붙어있다고.
그 일이 무언가 잘 못된 것이었다는 걸, 서툴고 무심한 엄마의 실수라는 걸 20년이나 지나서 깨닫게 되었다. 그 사이 이 일은 수없이 복기되었다. 친구들에게, 혹은 아무도 보지 않는 블로그에, SNS에. 내가 그런 서글픈 기억이 있다는 정도로만 되짚어지다가,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부모도 그렇게 어린애를 혼자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것. 그날 내 손을 잡고 교실에 들어갔어야 하는 사람은 엄마였다는 걸. 아주 늦게 깨달았다.
엄마나 나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도 한 번은 둘이서 회를 마시며 소주 한 병을 시켜본 적이 있다. 술은 술 그 존재만으로도 뭔가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니까. 서로 짠- 하고 한잔씩 하고, 기분 좋게 농담도 했다. 그때 또 엄마의 과거 회상이 시작되었다. 엄마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실컷 들어주다 보니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이제는 나도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었다. 그리고 결국, 20년 만에 처음으로 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혼자서 2시간씩 교문 앞에 웅크려있었고, 엄마에게 혼날까 봐 말하지 못했던 일을.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엄마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엄마가 몰랐겠니? 담임 선생님이 전화해 줘서 알고 있었어.’
‘뭐..? 그럼... 알고 있었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왜?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때도, 그 이후로도? 왜 아무 말도 나에게 안 해줬어? 그때 내가 어땠을 것 같아? 내가 불쌍하지도 않았어? 안 미안했어? 왜 엄마는 미안하다고 하질 않아? 나한테 미안한 거 없어?’
엄마는 말이 없었다. 그 일이 그 후로 다시 언급되는 일도 없었다.
때로는 침묵도 해설이 되기도 한다.
다만, 내 나레이션이 당시 엄마의 기억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까지는 알 수 없다.
그때 엄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유일하게 자신을 이뻐해 주던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모든 친척들에게 공격받고, 미련이 뻔히 있으면서도 굳이 아빠를 밀어내고, 잘 알지도 못하는 동네 사람에게 동정받고, 8살 난 딸애를 교문 앞에 두고 일터로 떠나는 심정. 그리고 나중에 전화를 통해 들은 딸아이의 이야기. 그걸 들은 엄마는 대체 어땠었길래. 어떻길래.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할까.
엄마는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래서 했을 뿐이다. 딸인 나, 내 기억이 아니라. 딸을 이야기하려던 것이 아니라 어머니 당신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거다. 나는 엄마가 말하는 엄마에 비춰 나를 들여다보며 내 과거를 구축해 왔다. 미련, 회한, 원망, 자책, 슬픔, 분노... 그것들은 내가 모르는 것, 내가 아는 것, 사람, 내 주변을 향하기도 했고 때때로 나 자신을 향하는 것들도 있었다. 내 기억의 덩어리들은 보통 그런 것들을 중심점 삼아 응결했고 뿌리내렸다. 감정과 해설이 붙는 기억은 보강되기도 하지만 기존의 것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망가진채 완성되는 기억의 덩어리들. 내 안에는 엄마의 한이 깊숙이 배어 있다. 한 조각 잘라서 푹 우려내면 아마 서러운 맛이 듬뿍 날 거다. 엄마의 눈물인지, 내 눈물인지까지는 알 수 없다.
엄마는 이제 과거 이야기를 하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아마도 시간이 엄마에게 평안을 안겨준 까닭이리라. 여전히 그 크고 단단한 덩어리들이 엄마를 차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다. 나 역시 이제는 엄마의 부연설명이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내 나름 고통의 터널을 지나오며 이제 내 유년기에 대한 미련은 내 나름대로 마침표를 찍었다. 다만 덧쓰고 있다. 날 붙들고 있는 과거들을 나 자신의 감정으로 다시. 내가 내 기억의 나레이터가 되는 거다. 나 역시 내 이야기가 하고 싶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이야기함으로써 내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나를 말하고 싶다. 나를 기억하고 싶다. 기억하는 일과, 기억을 읽어주는 것과, 읽어준 기억을 기억하는 것과, 그렇게 완성된 것을 다시 쓰는 일은 또 다르다. 이 글은 내 기억에 대한 나를 향한 또 다른 나레이팅인 것이다. 이 전에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듯, 이 글을 기점으로 내 과거, 그리고 그 과거를 바라보는 감정은 환기되어 새로이 또다시 기억될 것이다. 자유를 향해서.
또한 나는 엄마의 나레이터이다. 엄마가 내 기억의 공유자이듯, 나 역시 엄마기억의 공유자니까. 선으로 그어 놓은 어른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을 쯤부터 나 역시 엄마에게 우리가 공유한 기억에 자막을 달아주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꼭 과거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엄마는 이제 자주 잊고, 착각하고, 헷갈려한다. 얼마 전에는 나더러 넷째 외삼촌과 보령에 갔는데 비가 참 많이 왔다고 했다. 그래서 차에서 내다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도 안개 낀 회색하늘이 예뻤고, 그 아래에서 파도치는 바다가 참 아련하고 아름다웠다고. 나는 이제 엄마가 과거를 그저 놓아준 것뿐만 아니라 잃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내가 대답했다.
“엄마. 그거 내가 운전해서 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