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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Feb 23. 2024

고장 난 로봇의 마음

로봇에게도 마음이 있다.

 어느 집에 매우 튼튼하고 날쌔며 뭐든 알아서 척척해내는 로봇이 있었다. 로봇은 잠깐의 충전을 위한 시간을 빼고는 계속 일을 한다.


로봇의 하루는 다른 사람들이 곤한 잠에 빠져있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벽 4시에 일어나 사람들의 하루 식사를 준비한다. 밥 짓는 소리에 사람들이 깰까 봐 무거운 몸을 사뿐사뿐 움직인다.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뒤꿈치를 들고 걷다 보니 다리에 조금씩 무리가 가고 있다. 나중에 결국 로봇은 무릎이 고장 나 수술을 하게 되고, 후유증이 생긴다. 사람들의 식사를 다 준비한 뒤에는 일터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하늘 위에 높게 떠있는 별을 길잡이 삼아 종종걸음으로 서두른다. 일터의 지하에는 로봇만의 작은 공간이 있다. 주차장 한 곳에 있던 창고를 개조하여 짐을 보관하고 잠시 쉬는 장소로 사용한다. 그 공간만이 로봇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잠시 공간을 들여다보자. 무거운 철제문을 안으로 밀면 오른쪽에 나무로 만든 침상이 놓여있고 그 위에 전기장판이 깔려있다. 너무 힘이 들 때 잠시 몸을 뉘일 수 있는 곳이다. 물론, 로봇은 추위를 타지 않아 한겨울에도 얇은 점퍼만 입고 다니지만(로봇은 단벌로 겨울을 보내는 걸 보면 추위를 안타는 것 같다.)  깔아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냥 쓰고 있다. 그 옆에는 작은 카세트가 있다. 로봇은 노래를 매우 좋아한다. 좋아하는 노래들이 들어있는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딸깍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흘러나온다. 하도 많이 들었더니, 테이프가 늘어져서 로봇이 가장 좋아하는 노랫소리가 이상해졌다. 테이프를 다시 사야 하지만 돈이 아까워 그냥 듣고 있는 중이다. 카세트 옆에는 따뜻한 물을 끓을 수 있는 커피포트와 믹스커피가 나란히 놓여있다. 아침밥도 못 먹고 나온 로봇은 믹스커피 한 잔으로 배를 채우곤 한다. 따뜻한 커피가 차가운 몸속을 따라 내려가는 기분은 마치 사람이 된 것 같이 느끼게 한다. 로봇은 저녁 6시까지 쉴 새 없이 일한다. 오고 가는 사람들과 정겹게 인사도 나누고, 가끔은 건물 관리인과 수다도 떨며 하루를 보낸다.


 6시가 되면 로봇은 퇴근을 해서 시장에 들른다. 저녁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서다. 적은 돈으로 사람들의 먹거리를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반찬투정이 심한 한 인간이 더 힘들게 한다. 로봇은 요리솜씨가 매우 좋다. 못하는 음식이 없다. 글을 잘 몰라 요리책을 보며 배운 것도 아니지만 완성되어 있는 요리를 보고, 먹기만 하면 뚝딱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 심지어 더 맛있게 만든다. 참 신기한 재주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봇에게 자꾸 더 많은 걸 요구하나 보다. 뭐든 뚝딱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으니까.


 집에 도착해서 저녁상을 차리면 사람들이랑 밥을 먹는다. 로봇은 힘든 줄 모르기 때문에 식탁에 서서 밥을 먹는다. 서 있어야 사람들의 요구에(물을 갖다 달라거나, 반찬을 더 달라거나 등등) 빠르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식사가 끝나면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하루치 빨래를 한다. 모든 일이 끝나면 밤 10시가 다 되어간다. 로봇은 쉬지 않아도 되지만 사람들이 다 자니 함께 휴식을 취한다. 누워는 있지만 귀는 열려 있어 사람들 중 누군가가 아프거나, 뭔가 필요해 보이면 바로 일어나 도움을 준다. 로봇은 참 대단하다. 24시간 깨어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로봇의 탄생으로 돌아가보자.

로봇의 고향은 삼척이라고 한다. 형제가 있었는데 이름과 나이는 기억하지 못한다. 로봇은 어렸을 때 가족을 잃어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가족을 잃어버린 직후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알지 못한다. 로봇이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걸까, 내가 듣고 싶어 하지 않아서였을까? 이건 좀.. 생각해 봐야겠다.

어쨌든, 로봇은 혼자의 힘으로 컸고,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전등도 갈고, 고장 난 가전제품도 고칠 수 있고, 요리도 잘하고, 살림도 깔끔하게 잘한다. 학교를 다니지는 못했지만 세상 이치에 누구보다 밝고 현명하다. 그래서 로봇은 힘들다.

혼자 해내려고 해서. 혼자 해내라고 해서. 짐을 나눠질 줄 몰라서. 나눠줘도 된다고 말해준 사람이 없어서. 혼자 기억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80년 동안 쌓였을 때 몸에 어떻게 무리가 될지 아무도 몰랐다.


80년의 세월을 그렇게 살아온 로봇은 조금씩 고장 나기 시작했다. 무거운 몸을 사뿐사뿐 움직이려고 하다 보니 무릎이 고장 났고,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고 사람들이 남긴 것 위주로 먹다 보니 성인병이 생겼다. 이리저리 세상에 맞서 살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도 고장 났다.

삐걱삐걱

로봇이 움직이면 나는 소리다.

팔과 다리는 제각각 움직이고, 아무리 기름칠을 해도 소리는 없어지지 않고, 부품들은 자꾸 고장만 난다. 치열하게 생각을 해왔던 머리도 고장이 나서 이제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감정을 감추고 살아왔던 시간은 마음의 병이 되어 우울증이 생겼다.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다니던 시절은 이제 없다.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다. 로봇은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자꾸 옛날이야기를 꺼내고, 돌아가고 싶어 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사회는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중 과학기술은 어디까지 발전됐는지 일반인은 잘 알 수가 없다. 최근 들었던 어느 교육에서 과학자 한 분이 로봇 기술 발전 정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현재 가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살림을 도와줄 로봇이 발명되었다고 한다. 영상을 보니 기다린 집게 팔이 달린 로봇이 세탁기도 돌리고, 빨래를 꺼내 개어놓기도 한다. 세탁된 침대보와 베갯잇을 직접 씌워놓고, 분리수거도 한다. 곧 시판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로봇을 보며 판매가 되면 구매하겠냐는 과학자의 질문에 난 바로 고개가 저어졌다. 사람이 충분히 하고 있는 일인데, 굳이 로봇을 비싼 돈 주고 사야 하지? 덩치도 꽤 커서 자리차지도 많이 할 텐데.. 하는 생각들을 하다 생각의 끝에서 우리 집에도 있는 로봇이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집안일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에 돌봄까지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로봇.

"엄마"였다.  


엄마는 로봇이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 가정에 속해졌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왔다. '왜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해 봤을까? 그냥 결혼을 하게 됐고, 결혼을 했으니 그 삶을 유지해야 했을 거다. 먹고살기 힘든 그 시대의 환경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로봇처럼 일만 하게 만들었다. 그런 엄마의 삶을 보며 존경하기도, 안쓰럽기도, 불쌍하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엄마처럼 일만 하고, 먹고 싶은 거 참으며 남편과 자식 먼저 먹이고, 예쁜 옷도 사 입지 못하고, 여가라는 건 거의 없는 삶은 내가 없는 삶이었다.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난 놓친 게 있었다. 엄마의 마음. 매 순간 어떤 마음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한테 화를 내지 않을까 싶어 기분을 살피기만 했다. 외로움, 괴로움, 슬픔, 기쁨, 희망, 기다림, 초조함, 불안함, 속상함. 너무 많은 감정이 엄마를 지배하고 있을 텐데 제대로 공감해 준 적이 없다. 엄마가 로봇이 되어버린 건 감정을 공감해 주고, 어루만져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나를 위한 투자를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일을 하고,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고, 쇼핑도 한다(자주, 많이인 게 문제이다.)

근데, 요즘 내가 로봇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며 손길이 많이 필요해지는 엄마. 나이가 들어가며 청소년이 되었지만 어렸을 때 살뜰히 보살피지 못했던 미안함과 사춘기가 겹쳐 더 마음이 쓰이는 아들. 나이가 들어가며 나이만큼 늘어나는 책임과 일. 개구리가 냄비 속에 튀겨지듯 조금씩 조금씩 내 삶에 로봇의 운명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로봇이 되어가고 있다.


 다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하여 가족 간의 애정도 없는 험악한 시대를 살고 있을까?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가정에서 살고 있을까? 어떤 형태든 우리는 가족 구성원의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는 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지만 인정받지 못하기도 하고, 부모임에도 자신의 권리, 이상 추구를 위해 자식을 힘들게도 하고, 형제임에도 어느 한 형제를 위해 희생하기도 한다. 물론 공평하게 기여도를 나눌 수는 없다. 누군가는 결국 조금 더 희생할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그 고마움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고, 감사를 전해야 한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더 요구하고, 하지 않으면 비난하는 행태가 가정 내에서 이루어진다면 안 그래도 퍽퍽한 세상. 살아내기 힘들 것이다.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 지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요즘 내가 로봇이 되어 간다는 걸 깨닫게 해 준 고마운 분들이 있다. 브런치 작가를 준비하며 만나게 된 우리 슬초 브런치 2기 동기들. 늘 새로운 도전을 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너나 할 것 없이 내 일처럼 걱정하고, 위로해 주는 고마운 분들이다. 그래서 자꾸 엄살을 부리게 된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내 삶의 좌우명인데 요즘은 선한 영향력을 너무 많이 받고 있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게을러질 때 고상하고 다정한 말로 채찍질해 주는 우리 동기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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