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적 모델로 무장한 금융공학 '첨병'
입력 2009. 11. 26. 16:38 수정 2009. 11. 26. 16:38
요즘 금융가에서 수학과와 물리학과 출신들이 인기다. 주로 금융공학의 첨병인 퀀트로 활약한다. 작년 금융 위기로 월스트리트에는 찬바람이 가득하지만 한국은 이제 막 '퀀트의 시대'를 맞고 있다. 자연의 심오한 진리를 탐구하던 아인슈타인과 가우스의 후예들은 이제 욕망이 들끓는 금융시장을 꿰뚫는 완벽한 수학적 모델을 찾는다. 캠퍼스의 외진 연구실에서 화려한 금융가로 진출한 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지난 11월 18일 오후 3시. 여의도 한국투자증권 19층 트레이딩 룸에는 칼날 같은 긴장이 흘렀다. 훤칠한 키의 서승석(39) 투자공학부장은 "종가 나왔다. 괜찮다"며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취재진을 맞았다. 서 부장은 박사 3명, 석사 1명으로 짜인 퀀트팀을 이끌고 있다. 2004년 말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 입사해 여의도에 첫발을 디딘 그는 요즘 이공계 대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퀀트(Quant)'의 대표 주자다. "그때만 해도 증권사에서 이공계 출신 박사를 뽑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죠."
그는 2003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편미분방정식. '자연계 현상을 미분방정식으로 표현해 탐구'하는 순수 수학 영역이다. '해(解)의 존재성'에 심취해 있던 그가 퀀트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은 같은 대학에 유학하던 장원재 현 삼성증권 부장을 통해서다. 금융수학에 빠져 있던 그의 영향으로 현재 금융권에서 활약하는 미네소타주립대 수학과 출신이 여럿 된다. 미국에서 퀀트는 이미 각광받는 직종으로 꼽혔다. 대학 내 옵션 강좌도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마침 국내 캐피털 회사에서 해외파 리스크 관리 인력을 뽑았다. 대학 연구실을 떠나 낯선 금융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대상만 다를 뿐 하는 일은 비슷퀀트의 주된 업무는 수학적 모델링을 활용한 파생상품 설계다. 약간의 오차도 엄청난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고도의 수리 능력을 갖춘 석·박사급 인재를 찾는다. 학교와 금융계의 가장 큰 차이는 '속도'다. "학교에서는 높은 수준의 결과를 위해 문제를 천천히 생각하고 수없이 반복합니다. 1~2년에 하나의 결과가 나오죠." 반면 퀀트는 호흡이 짧아야 한다. 어떤 요구든 매우 신속하게 결과를 도출해 내야 한다. "학교에서는 99% 완성도를 99.1%로 올리는 게 학문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만 현업에서는 90% 완성도를 99%로 끌어올리기 위해 몇 주를 보내는 것보다 90%라도 상품을 빨리 내놓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수학적 방법론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이다. 서 부장은 "증권사에서 일하지만 여전히 수학자라고 생각한다"며 "계속 공부하는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허태일(31) 한화증권 금융공학팀 대리는 지난 4월 입사한 신출내기 퀀트다. 그는 올 초 카이스트에서 입자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년 초만 하더라도 그는 우주 암흑물질을 규명하기 위해 초대형 입자가속기에서 나온 데이터에 파묻혀 있었다. 멋진 양복을 잘 차려 있고 번쩍이는 금융회사에 출근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암흑물질 연구에서 기초는 입자가속기 실험과 천체 관측이다. "박사학위를 마치면 평생 물리학을 연구하며 살 것이라고 생각했죠. 처음 전공을 정할 때부터 그랬어요."
그런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퀀트(승산 펴냄)'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이었다. '퀀트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이매뉴얼 더만 컬럼비아대 교수가 쓴 책이다. 배고픈 물리학자에서 골드만삭스의 퀀트 헤드로 변신한 그의 드라마틱한 삶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금융계로 진출한 선배가 금융수학 교재와 함께 이 책을 건넸다.
더만 교수의 전공도 입자물리였다. 논문 통과를 앞두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도 생겼다. "박사 학위를 받아도 몇 년이 될지 모르는 박사후과정(포스트 닥터) 생활을 또 해야 해요. 그런다고 교수가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죠."
전문 서적을 살펴본 그는 입자물리에서 배운 것을 금융 분야에 거의 그대로 쓸 수 있다는 데 깜짝 놀랐다. 입자물리학자는 가속기 신호를 가공해 데이터를 뽑아내고 이를 모델링해 이론화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따라 컴퓨터 활용 능력과 첨단 수학 지식은 필수다. 파생상품을 설계하는 퀀트에 필요한 능력과 일치한다. "물리학 중에서도 입자물리는 기업과 연관성이 전혀 없어 사실 취직은 생각하지도 못하죠. 이제는 금융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행운이에요."
허 대리는 아직 금융시장의 초보자다. 주로 파생상품의 디자인과 가격 결정을 배운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도전 정신을 유발하는 그의 직업에 벌써 매료돼 있다.
퀀트는 쉽게 말해 '수학 모델을 활용하는 금융공학자'를 뜻한다. 주로 수학을 이용해 시장을 읽고 금융상품을 만들며 그것의 가격을 결정하는 일을 한다. 미국에서는 1970년대 후반 아폴로 계획이 종료되자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거 월스트리트로 유입되면서 퀀트라는 직업이 탄생했다. 1990년대 초 냉전이 무너지면서 이러한 '대이동'은 더욱 가속됐다.
정부의 투자 축소로 위기에 몰린 이공계 박사들이 금융시장에서 새로운 기회의 땅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파생상품 분야가 빠르게 확대되던 시장 분위기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골드만삭스나 모건스탠리 같은 유명 투자은행들은 본점에만 300여 명의 퀀트를 두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와 금융시장 붕괴를 경험하면 완벽한 것만 같던 '금융공학의 신화'에 금이 간 것은 분명하다. 월스트리트에서 퀀트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도 사라졌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퀀트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 단계다. 카이스트 금융공학연구센터를 맡고 있는 강장구 교수는 "한국은 오히려 퀀트가 부족한 나라"라고 말했다. 국내 금융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더 많은 퀀트가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인력 확보 경쟁 … 백지수표 제시하기도카이스트는 현재 국내 금융시장에 퀀트 인력을 공급하는 주된 통로다. 매년 5~6명의 금융공학 박사와 20여 명의 석사를 배출한다. 이들을 잡기 위해 매년 금융회사들이 줄을 선다. "금융 위기 전에는 5~6개 좋은 곳을 놓고 골라갈 정도였어요. 금융 위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지만 작년 졸업생들도 원하는 데를 다 갔지요. 어떤 학생은 백지수표를 받기도 했어요."
퀀트의 몸값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인센티브에 따라 변동이 심하기 때문이다. 한 업계 전문가는 "인센티브를 포함해 대리급은 1억 원, 그 위 직급은 2억 원 이상"이라고 말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결코 적지 않은 액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강 교수는 "처음 부임한 2002년 무렵에는 정보기술(IT) 중심인 경영정보시스템(MIS)이 가장 인기있는 전공이었다"며 "지금은 금융공학이 대세"라고 말했다.
홍창수 한화증권 금융공학팀 차장은 1999년 삼성경제연구소 포럼 코너에 '한국금융공학포럼'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10여 명으로 출발한 회원 수는 꼭 10년 만에 1만7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현직 퀀트와 퀀트를 꿈꾸는 학생들이 모이는 가장 규모가 큰 모임이다.
홍 차장은 한국에서 퀀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점을 2004년으로 꼽는다. 당시 주가연계증권(ELS)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파생상품 인력에 대한 수요가 생기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금융회사들이 단순히 해외에서 상품을 들여와 파는데 만족했지만 시장이 커지면서 자체 생산이 필요해진 것이다. '파생상품 공장'의 핵심은 바로 퀀트다.
포럼 회원은 현역 퀀트와 학생들이 전부는 아니다. 비금융권 직장인들도 퀀트를 꿈꾼다. "회원 중에 전자회사 연구원이나 통신 분야 연구원도 많아요.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고 미래도 밝은 금융 분야로 이직을 하고 싶어 하죠."
이공계 연구원들의 경우 공학적 기초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적응이 쉽다는 강점도 갖고 있다. 수학적 지식과 프로그래밍 능력에 금융 지식을 약간 더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홍 차장은 "퀀트 수요는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본시장법 시행으로 장외 파생상품 시장은 급성장이 예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연가스, 금, 은, 탄소 배출권 등 거의 모든 대상을 기초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또한 퀀트는 앞으로 예상되는 금융투자회사 경쟁에서도 핵심 경쟁력이다. 그러다 보니 특정 금융사에서 카이스트 졸업생들을 수십 명씩 '싹쓸이'하는 일도 벌어지고 한다.
블랙-숄즈 모델이 가져온 금융 혁명퀀트가 하는 일은 역할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현재 주류는 파생상품 설계다. 연봉도 가장 높고, 취업 기회도 많은 편이다. 이 분야를 지배하는 황금률은 '블랙-숄즈 모델'이다. '경제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이론'으로 평가받는 이 모델은 1973년 골드만삭스에서 일하던 피셔 블랙과 스탠퍼드대 마이런 숄즈 교수가 발견한 것이다. 이에 따라 현대 금융의 혁명은 시작됐다. 공기 중에 피어오르는 연기나 액체 위를 떠다니는 꽃가루 같은 자연계의 불규칙한 운동에 대한 수학적 모델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블랙-숄즈 모델은 주식 옵션의 공정 가격을 결정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온갖 종류의 기초 증권을 바탕으로 고객이 원하는 수준의 위험도에 정확하게 맞춰 옵션을 제조해 팔고 그 위험은 자신이 떠맡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 더만 교수는 이를 "산소와 수소가 가득한 목마른 세계에서 누군가가 드디어 물을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 모델이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의 '자세한' 설명을 몇 차례 들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최근의 금융 위기는 이 모델의 효용성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가장 강한 비판가는 '블랙 스완(동녘사이언스 펴냄)'이란 책으로 유명한 나콜라스 탈레브 뉴욕대 교수다. 금융시장에서 '검은 백조'의 발견 같은 기존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사건이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기존 모델은 쓸모없다는 날선 공격이다. 강장구 교수는 "이번 금융 위기는 수학적 모델링을 너무 과신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줬다"며 "금융공학에 대한 조심성이 커진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강 교수는 극단적인 무용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서승석 부장은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졌다고 핵물리학자를 비난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전문가들은 향후 성장 가능성이 큰 퀀트 분야로 시스템 트레이딩을 꼽는다. 종목 정보나 애널리스트의 분석에 의존하기보다 주가 흐름을 마치 자연현상처럼 관찰해 자동적으로 거래하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수학적 모델을 활용하는 퀀트 펀드가 상당한 규모로 자리 잡고 있다. 운용 자산이 200억 달러에 달하는 헤지 펀드 르네상스 테크놀로지가 대표적이다. 퀀트 펀드의 개척자로 불리는 이 회사 제임스 사이먼스 대표는 지난해 연봉으로만 25억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금융 허브 견인차 … 육성론 확산최근 국내에서도 퀀트 펀드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초보 단계다. 지난해 나온 '대신 액티브 퀀트 펀드'는 올해 50.28%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코스피 상승률 35.82%를 훨씬 웃도는 성적이다. 양해정(35) 대신증권 투자공학팀 팀장은 "매출액과 자본, 현금흐름, 배당 등 4개 기준을 기본으로 하면서 공격적인 성격을 가미했다"고 말했다.
파생상품에 비해 주식 퀀트는 아직 소수다. 양 팀장은 "앞으로 퀀트 펀드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몇몇 기준을 잣대로 종목을 골라내는 접근법으로는 '평균 이상의 플러스 알파'를 챙기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양 팀장은 "주식 퀀트들은 시장의 모든 정보를 이용해 나만의 '절대적 룰'을 만드는 것을 꿈꾼다"고 말했다.
한국이 수년째 추진하고 있는 '금융 허브'의 가능성이 퀀트에 달려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홍콩·상하이·싱가포르·도쿄 등 경쟁 도시들을 앞설 수 있는 분야로 퀀트를 전략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논리다. 강 교수는 "한국인은 수리적 재능이 뛰어나며 IT에도 강점이 있다"며 "한국이 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분야"라고 말했다. 미국 시카고처럼 서울을 파생상품의 도시로 키우자는 것이다. 그러자면 더 많은 퀀트 양성은 필수다.
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