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의 서양철학사 16장
틸리의 서양철학사의 16장은 칸트를 통해 문을 연다. 그는 철학의 좌표계를 바꾼 혁명가였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돈다”는 상식을 깨고, 지구가 돈다고 선언했듯, 칸트는 “인식이 대상에 맞추어진다”는 통념을 뒤집었다. 이제 대상은 우리의 인식 구조에 맞추어진다. 시간(Zeit)과 공간(Raum), 그리고 오성의 범주(Kategorien) 속에서만 세계는 드러난다. 이것이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e)’이다.
하지만 이 전환은 완결되지 않았다. 칸트는 세계가 인식 구조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물자체(Ding an sich)”라는 알 수 없는 영역을 남겨두었다. 인간은 현상(Erscheinung)만을 알 수 있고, 사물 그 자체(Ding an sich)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그늘 속에 머물러 있다. 이 ‘공백’이 바로 칸트의 위대함이자 한계였다.
후계자들은 이 빈자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야코비는 칸트가 닿을 수 없다고 남겨둔 세계를 신앙(Glaube)으로 채웠다. 이성(Vernunft)은 건널 수 없는 강을, 직접적인 믿음만이 건널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피히테는 더 과감했다. 아예 물자체(Ding an sich)를 삭제해버리고, 모든 것을 자아(Ich)의 능동적 활동에서 파생시켰다. 셸링은 주체와 객체(Objekt)의 분열을 치유하려 했다. 자연(Natur)은 무의식적 정신이고, 정신(Geist)은 의식화된 자연이라고 말하며, 두 세계를 하나의 유기적 과정으로 묶었다. 그리고 헤겔은 이 모든 분열을 역사(Geschichte)적 변증법(Dialektik) 속에서 화해시키려 했다. 절대정신(der absolute Geist)이 자기 전개를 통해 모순을 지양(Aufheben)하고, 세계와 이성을 통합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칸트가 던진 물음은 이렇게 독일 관념론(Deutscher Idealismus) 전체를 태동시켰다. 혁명은 칸트가 시작했지만, 그 여파를 수습하는 일은 후계자들의 몫이었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울림이 생긴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문제를 ‘존재론(Ontologie)’ 차원으로 옮겼다. 그는 물자체(Ding an sich)와 현상(Erscheinung)이라는 이원론 대신, 존재(Sein)가 드러나는 장(場)을 강조했다. 세계는 언제나 현존재(Dasein)의 이해 안에서만 의미화된다. 니체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사실(Tatsache)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Interpretation)만 존재한다”고 단언하며,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마저 철저히 해체했다. 진리는 더 이상 구조가 아니라 힘(Macht)과 해석의 산물이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의 양자역학(Quantenmechanik)은 이 철학적 계보와 묘하게 겹친다. 쉬뢰딩거의 고양이(Schrödingers Katze)는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다. 관찰(Beobachtung) 이전에는 상태(Zustand)가 결정되지 않는다. 관찰자가 개입하는 순간에만 ‘실재(Realität)’가 확정된다. 물론 물리학과 철학은 다른 언어를 쓰지만, “관찰이 세계를 구성한다”는 이 통찰은 칸트 이후의 철학적 모색과 기묘하게 공명한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단순한 인식론적 수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존재와 세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 시작이었다. 물자체(Ding an sich)라는 그림자는 철학자들을 자극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야코비의 신앙, 피히테의 자아, 셸링의 자연, 헤겔의 절대정신, 하이데거의 존재, 니체의 해석, 그리고 오늘날 양자역학의 관찰자 문제까지.
칸트가 남겨둔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가? 아니면 언제나 인간의 조건 속에서만 만나는가? 칸트는 철학을 뒤집었지만, 그 뒤집힌 세계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혁명은 지금도 우리를 흔들며, 또 다른 사유의 길로 초대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혁명, 그 여파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길을 묻는다.
틸리, F. (2006). 서양철학사. 김기찬 (역). 서울: 이문출판사.
(원저 출간년도: 1931. 원제: A History of Philoso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