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년 반이 지났습니다. 이세돌 국수가 알파고에게 충격적으로 패하고 손을 떨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복기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세돌의 ‘떨리는 손’과 ‘떨리는 목소리’는 우리의 ‘떨림’이 되었습니다. 많은 변화가 숨 가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프로 바둑 기사에게 바둑을 가르치고, 의료 데이터를 판독하고, 주식 트레이딩을 하고,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소프트웨어 코딩을 하고, 동시 통번역을 하고,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해 사람들은 극단적인 예측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대부분을 실업자로 만들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고 정부는 로봇세 등을 거두어서 인간에게 기초 생활급을 지급하여 인간의 삶은 더 행복질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전망입니다.
불행하게도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기술 발달은 역사적으로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기계로 인해 직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서 떠돌아다녀야 했고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농업, 축산업, 자동차, 철강업 제조업 등 산업을 가리지 않고 기계에 의한 노동 대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자동차 공장에서 조립형 로봇이 사람을 대체한 지 오래되었고, ‘스마트 팩토리’라는 이름으로 공장의 로봇화는 갈수록 대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서비스업 노동자와 지식 노동자마저 기술에 대체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기술 옹호론자들은 새로운 기술이 기존의 고용을 파괴하지만 새로운 고용을 창출한다고 말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고용은 줄었다고 ‘제러미 리프킨’은 말합니다. 트럼프가 아마존을 ‘고용 파괴자’라고 비난한 일은 21세기 모바일 기술이 어떻게 고용을 죽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기술이 경제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듯이 현재 인공지능을 시도하고 있는 분야 역시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약자가 일하고 있는 분야입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서 가장 큰 변화는 콜센터입니다.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여 고객의 음성으로 신원 확인을 하고, 상담 내용을 자동으로 텍스트로 변환시켜주고, 과거 고객 불만사항을 알려주고, 예상 상담 내용을 알려줌으로써 상담인력을 효율화하고 있습니다. 가장 앞선 제품을 내놓고 있는 회사는 역시 구글입니다. 구글의 수석 AI 엔지니어 ‘페이페이 리’는 기존의 콜 센터를 AI와 빅 데이터를 활용하여 단순 업무를 자동화하고 복잡한 업무를 효율화하는 ‘AI 콘택트센터'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습니다. 구글의 기술은 키오스크와 더불어 서비스업에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일자리를 빠른 속도로 빼앗을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타다’ 논란도 단순히 위법 여부를 따질 것이 아니라, ‘타다’가 자율 주행의 이전 단계 사업이라는 점에서 기술의 발달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해를 얼마나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인가가 먼저 고려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적용될 수 있는 분야가 어디로 확장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범위가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죠. 양자컴퓨터와 빅데이터로 ‘특이점’을 통과하면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책이 되어버린 <특이점이 온다>에서 '레이커스 와일'이 주장했던 내용입니다. 그는 신디사이저 혁신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신디사이저가 처음 나왔을 때 음악가들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이제는 작곡의 표준이 되었듯이 인공지능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저성장에 돌입한 기업들은 갈수록 인건비가 부담스럽습니다. 신규채용을 줄이기 위해서 공채 제도를 없애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인력에 투자하기보다는 R&D에 투자하고 기술을 가진 회사를 M&A하기를 원합니다. 미래 기술이 생산성을 더 높여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용주의 선의만으로 개인의 고용을 책임져줄 수 없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샐러리맨의 존재 의미가 갈수록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샐러리맨들은 어떻게 미래를 대체해야 할까요?
위기의 또 다른 이름, 기회
1867년 독일에서 대학 졸업자가 처음으로 기업에 취직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리드리히(Friedrich von Hefner-Alteneck)로 지멘스(Siemens)의 연구개발 직원으로 고용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대학은 회사에서 일하기 위한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한 기관으로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대학이 자본의 인력 공급 역할을 한 이래로 지금처럼 대학 졸업자가 바로 창업을 하거나,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발적으로 회사를 떠난 사람이 많은 것은 지금이 처음일 것입니다.
과거와 달리 젊은이들이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모바일 플랫폼의 발달입니다. 기술의 발달은 독립을 꿈꾸는 이들에게 많은 기회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엘빈 토플러’ 말한 ‘지식의 민주화’뿐 아니라 플랫폼을 통한 ‘사업 기회의 민주화’에도 기여했습니다. 과거에 라이선스로 제한되어 있던 사업의 기회가 모든 개인에게 열렸습니다. 아이디어와 창의성만 있다면 라이선스와 자격증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되고 있고 있습니다. 능력과 재능만 있다면 제품이든 서비스든 팔 수 있는 채널은 온라인에 널렸습니다. 네트워킹과 채널링 때문에 회사에 다녀야 했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유튜브가 방송사의 방송 독점권을 깨뜨렸고, 우버가 택시 기사들의 라이선스를 깨뜨렸고, 에어비앤비가 호텔의 사업권을 빼앗았고, 블로그, 브런치, 웹 소설 등 글쓰기 플랫폼이 문학계의 배타적인 ‘등단’이라는 시스템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비트코인은 중앙은행의 통화 발행권을 넘보고 있습니다.
대기업을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유튜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상뿐 아니라 수입도 공개하면서 프리랜서들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퇴사의 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개인의 연대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방송에 출연해 주는 ‘합방’을 하고 개인과 개인이 서로에게 수요자이자 공급자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고 그 변화에 자신의 창의성으로 임기응변(臨機應變 기회에 임해서 변화에 대응한다)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즐겨 찾아보는 유튜버가 있습니다. 바로 ‘브런치’를 통해서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해서 작가, 번역가, 유튜버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메리 씨입니다. 그녀 역시 회사를 다니다가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 퇴사를 하고 프리랜서로 전향했습니다. 아나운서 같은 정확한 말투와 소위 ‘국내파’지만 뛰어난 영어실력 그리고 다정다감한 미소로 많은 구독자 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채널을 처음 구독했을 때는 그냥 회사 다니기 싫어서 나온 회사에서 날마다 보는 그런 평범한 젊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콘텐츠를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책을 한 권 두 권 써내는 (지금은 벌써 네 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놀라움을 넘어서 부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노동의 미래가 암울한 시대에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불빛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자유롭고 당당한 삶을 응원합니다.
직장인들은 장기적으로 모두 프리랜서입니다. 저도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회사를 퇴사하면 프리랜서로 일해야 할 처지입니다. 창의성을 갖춘 프리랜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양한 플랫폼과 모바일 시대에는 이런 기회들이 넘쳐나기 때문이죠. 기술의 발전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고 준비된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방법도 제시합니다. 목화 농장에 기계가 들어오자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으로 할 수 없이 옮겨야 했던 노동자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개인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것
이성에 대한 반성
19세기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를 하게 한 철학자가 세 명 있었습니다. ‘니체’,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르네상스 시기의 철학 사조에 반하여 각각의 논리로 이성에 대하여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니체는 우리는 이성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에 의해서 행동한다고 했고, 마르크스는 인간의 이성이 ‘하부구조’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설파했으며, 프로이트는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이성이 불완전하다고 판단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습니다. 바로 인공지능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이 새로운 철학자가 되어 우리의 이성을 호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바둑판에서 벌어지는 인공지능의 바둑은 우리의 사고체계가 달라진다면 분명 우리가 인생을 다르게 살 수 있다는 단초를 전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공지능으로 인간에게 위기가 왔다는 생각보다 우리 인간의 사고체계에 문제가 없는지에 대한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경우의 수가 거의 무한대이고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하다는 바둑판에서 인공지능은 바둑 정석에 나오지 않는 아주 생소한 수를 여러 번 두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충분히 창의적이지 못합니다.
인공지능에게 분명히 부분적으로 손해라고 생각했던 수들이 큰 그림에서는 좋은 수가 되는 장면이 인공지능과 사람의 대국에서 여러 번 나옵니다. 인간의 조급함, 불안감 등으로 우리는 아직도 협소한 이익에 급급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이미 프로기사들은 인공지능에게서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고 그들의 실력은 향상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통해서 인간이 좀 더 똑똑해진다면 인공지능이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공감능력과 연대
AI 시대는 요구되는 능력으로 ‘4C’, 즉 비판적 사고력(Critical thingking), 창의성(Creativity), 소통 능력(Communication), 협업 능력(Collaboration)을 이야기합니다. 모두 획득하기 어려운 것들이지만 회사의 젊은 직원들을 보면 특히 소통과 협업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갈수록 개인화되고 파편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소통과 협업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기까지 합니다. 소통과 협업이 안 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공감능력의 부재'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통하기 싫고 그래서 협업이 안됩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알기 위한 노력도 분명 중요하지만 인간을 알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공지능과 경쟁하기 위해서라도 사람과 공감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 분야에 인공지능은 강하게 치고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쟁자 무시하기
바둑은 본디 전략 게임이라서 상대방에 대한 공부가 중요합니다. 조훈현을 공부하고 극복하여 '이창호 류'가 탄생하고, 이창호를 공부하고 극복하여 '이세돌 류'가 탄생했습니다. 인공지능은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상황에 맞는 최선의 수를 둡니다. 혹시 우리는 너무 경쟁자를 의식하고 경쟁자의 의중을 너무 많이 생각해서 이성적 판단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둑은 기세 싸움이라고 합니다. 바둑돌을 놓을 때 바둑판에 '탁!'하고 기세 좋게 놓는 이유입니다. 인공지능에게는 기세가 없습니다. 패싸움은 무조건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바둑과 달리 인공지능은 패싸움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과 정력을 경쟁자와의 기싸움에 소비하고 있고 그래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존재가 되고 있지는 않을까요?
사람의 데이터를 받아서 학습한 ‘알파고 리’보다 기본적인 규칙만 익힌 채 스스로 강화 학습을 한 ‘알파고 제로’가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알파고 리’가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혹은 경쟁자가 만든 데이터를 최대한 많이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노력합니다. '알파고 제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남의 데이터를 머릿속에 잔뜩 집어넣으려는 것보다 최소한의 데이터만 집어넣고 '스스로 사고’하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을 내 편으로
기술발전은 자본주의가 살아있는 한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지속적으로 겪게 될 변화라는 의미입니다. 기술 발전을 대하는 샐러리맨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모든 회사가 인공지능 경쟁력을 이야기하고 모든 국가에서 인공지능 강국을 외치고 있습니다. 프로 바둑 기사들이 인공지능을 통해서 바둑 실력을 향상하듯이 개인도 마찬가지로 인공기술을 활용한 개인의 경쟁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언어인 파이선(Python)을 활용한 업무 자동화가 유행입니다. 저의 지인은 본인이 직접 파이선(Python)을 공부하고 자신의 업무분야의 업무 자동화 알고리즘을 작성해서 회사 업무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개인 경쟁력 강화의 아주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의 중요성
인공지능의 발달은 예술의 존재론에 대해서 질문을 하게 합니다. 예술가와 상관없이 독자적인 미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아니면 특정 예술가가 그것을 했기 때문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이세돌은 자신이 바둑을 통해서 예술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둑이 고도의 계산에 의한 확률 게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허탈했고 그래서 은퇴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완벽한 계산된 바둑을 보고 싶어 하는 걸까요? 아니면 이세돌 혹은 이창호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바둑을 보고 싶은 걸까요? 바둑 최고 하수지만 저는 이세돌의 날렵성과 창의성 그리고 이창호의 단단함을 감상하기 위해서 바둑을 공부했습니다. 만약 스티브 잡스가 애플 제품을 만들어낸 스토리가 없었다면 ‘앱빠’들이 이처럼 애플 제품에 광적으로 열광할까요? 사람의 스토리가 없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개인과 회사야말로 인공지능의 정말한 타깃 대상이 될 것입니다.
회사가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것
과거에 대한 반성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인터넷 모바일 서비스들은 기술을 통해서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던 (스티브 잡스를 비롯한) 60년대 히피들이 꿈꾸던 세상이 기술의 발달로 이제야 구현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즐겨보던 홀 어스 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그 잡지들을 통해서 당시 개발자들이 개발 아이디어들을 내놓았지요. 스티브 잡스의 그 유명한 스탠퍼드 연설문 Stay Hungry, Stay Foolish도 그 잡지의 폐간호에 실렸던 문장입니다. 그들은 기술을 통해서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기술을 통해서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던 기술자들이 꿈꾸던 세상이 구현되었는가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회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파괴적인 성장을 가속화시키지 않았는지, 물질을 멀리하라고 하면서도 사치품에 집착한 스티브 잡스가 보여준 이중성을 현재 창의적이라고 불리는 회사들이 갖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인공지능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우리의 이상은 무엇이고, 그로 인해 예상되는 부작용과 그 대비책에 대한 철학적, 경제적, 사회적 고민을 해야 할 때입니다. 혁명가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혁명의 대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적 상상력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혹은 완화하기 위해서 사회는 물론 회사에서도 인공지능 사용에 대한 윤리적 규범을 만들어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대세이고 어쩔 수 없으니 개인이 알아서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은 무책임합니다. 기계의 발전으로 인해서 약자가 더욱 피해를 보는 것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보여준 팩트입니다. 그리고 그 약자의 범위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 약자가 샐러리맨인 우리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인간들은 항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처하는 것에 미숙합니다. 이럴 때 상상력이 뛰어난 SF 소설이 다가올 미래를 촉매 하면서 올바른 기술 도입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SF 소설의 전설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공학의 3원칙>을 말했습니다. 제1원칙은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고, 제2원칙은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고, 제3원칙은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EU에서 로봇과 인공지능에 대한 법안을 수립할 때 기준으로 사용했고 그 후에 이 원칙에 기반한 영화들 예를 들면 <아이 로봇>이나 <바이센테니얼 맨> 같은 영화가 나왔다고 합니다. ‘헨리 포드’가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소비해 줄 노동자 계층을 위해 월급의 하한선을 정했다는 일화처럼 기계와 소비자와 시장을 크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미래 기업의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사회 파괴적이고 비인문적인 발전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부터 기업의 입장에서 인공지능 기술과 사업을 개발함에 있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인재의 보호
벤처기업 투자 프로젝트 때문에 만난 모 외국계 투자은행 임원의 고민이 생각납니다. 벤처 투자 프로젝트에 젊은 직원들을 투입시키면 젊은 직원들이 그 프로젝트 클라이언트 회사로 이직을 하거나 프로젝트를 하면서 얻은 창업 아이디어로 창업을 하기 위해 퇴사하기 때문에 젊은 직원들에게 벤처 프로젝트를 맡기지 않는다는 푸념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외국계 투자은행이 이런 고민을 하는 세상이 올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 했습니다. 이런 변화를 현재의 기업들은 감지해야 합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창의적인 인재를 갖기 위해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실리콘 밸리의 팀장들 Rdical Candor>이라는 책을 보면 직원들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라고 조언합니다. 이들이 이런 솔직함을 주장하는 것은 이들의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언제든지 창업하거나 이직할 수 있는 훌륭한 직원들을 회사에 잡아두기 위한 실리콘 밸리 리더들의 고육지책입니다. 한국 기업들도 인재 유출 방어를 위한 기업문화 개선에 노력을 해야 할 때입니다.
샐러리맨의 미래
샐러리맨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 사회에서 샐러리맨들은 대체로 중산층을 이룹니다. 자본의 집중과 양극화로 중산층이 얇아지고 있습니다. 중산층의 몰락은 샐러리맨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기술의 급습이 더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2090년까지 한국인의 99.997%가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노동 계급)가 될 것이라는 서울대 유기윤 교수의 주장은 극단적인 것 같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경고입니다.
회사에서 돈을 받는 계급은 사라지고 말까요? 아니면 인공지능과 로봇을 보조하는 무능한 인간들만 회사에 남게 될까요? 인간의 역사는 신을 극복하고 신에게 가까이 가려는 과정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을 합니다. 엔지니어들은 '유발 하라리'가 예측한 대로 '호모 데우스'가 될까요? 많은 SF 영화에서 묘사하듯이 우리는 그들을 제사장으로 혹은 교주로 모셔야 할까요?
미래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이 글을 썼지만 기계에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위험군에 종사하고 있는 저의 불안은 갈수록 커집니다. 수많은 불확실성과 보이지 않는 미래를 가슴에 품고, 겁 많은 저는 오늘도 만원 버스를 타고 회사로 출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