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탈리아, 햇살에 물든 화가의 공간
오래된 물건을 보고 모으는 일은 저에게 작은 즐거움입니다. 누군가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물건은 지나온 시간의 양만큼 닳아 저마다 고유한 지문 같은 모양을 띠게 됩니다. 다양한 공간과 사람을 거쳐 나에게 도착하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해보면 이름 모를 타인의 세상과 연결된 듯한 감각과 함께, 어쩌면 나보다도 더 오랜 삶을 살아갈 물건을 조금 더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그런 저에게 누군가의 애정어린 손길 아래 가꾸어진 공간을 구경하는 일은 참 즐거운 일입니다. 오래된 물건이 가득한 공간은 한 사람의 삶이 듬뿍 녹아있는 박물관같이 느껴지곤 해요. 세련된 감각으로 군더더기 없이 정돈된 공간도 물론 멋지지만, 제겐 조금은 어설프더라도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고, 개인적인 취향이 묻어나는 공간이 보다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한 사람의 시간이 담긴 공간은 그 사람의 삶이 담겨 고유한 온도를 품게 됩니다. 물리적인 온도가 아닌, 감성의 온도라 표현해야 맞을 거예요. 푸르거나 따스한 색과 부드럽거나 거친 질감, 조밀하거나 넓은 패턴의 물건들이 나름의 기준으로 모여 어색함 없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만의 온도를 가지게 된 공간을 방문하는 건 참 귀하고 기분좋은 일입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도시마다 하나씩 그런 가게를 만나게 됩니다. 나와 닮으면서도 또 다른 안목으로 채워진 공간에 머무르면, 취향이 확장되고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쉽게도 여행을 하며 만나게 된 공간을 다시 찾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기억 한 켠에 남아있는 그 공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좀 더 풍요롭게 느껴지고, 도시는 한결 특별하게 추억됩니다. 오늘은 그렇게 추억되는 여행 속의 여러 공간 중, 터키 안탈리아에서 만난 작은 화실의 기억을 전하려 합니다.
터키의 남부 도시, 안탈리아를 산책하다 인적 드문 골목에서 그림으로 가득한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둥근 의자 위에 놓여있는 상자엔 가격이 적혀있었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어요. 상자 속의 그림을 살펴보다 그림을 사고 싶어졌어요. 어떻게 살 수 있는 걸까 두리번거리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화실을 발견했습니다. 화실의 문은 열려있었고, 문 위엔 'MER'라는 글자가 적힌 파렛트로 만든 간판이 달려있었습니다. 햇살이 찬란한 날이면 으레 그러하듯, 바깥에서 바라본 화실은 어둑어둑하게 느껴졌습니다.
문가에 다가가 조용한 공간 안을 들여다보는데, 문 가까운 곳에 놓인 작은 책상에서 어깨를 웅크리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흰 머리칼의 화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햇살에 폭 감싸인 화가와 눈을 마주치며 '메르하바'하고 인사를 건네니 수줍은 미소가 돌아왔어요. 정겹게 휘어있는 눈매와 발그레한 뺨은 그의 얼굴을 조금 더 젊어 보이게 했습니다. 작은 화실에는 크고 작은 그림이 벽과 선반 위에 가득했습니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꽉 차 있었어요. 동양화부터 추상화, 정물화까지 무척 다양한 양식으로 그려진 그림들과 여러가지 도구들은 나름의 규칙으로 놓여있었습니다. 정갈하기보다 다소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공간에선 화가의 생활이 읽히는 듯했습니다. 둥글게 닳은 도구들 위로 햇살이 물든 공간에는 화가의 오랜 시간이 묻어있었습니다.
손이 닿지 않은 곳에 쌓인 먼지마저 세월의 흔적인 양 멋스럽게 느껴졌고, 나무의 갈라진 틈마저 감성으로 다가왔습니다. 문득 나도 이런 공간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화실 앞의 조용한 골목부터, 작은 소품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옮겨와 나의 것으로 삼고 싶을 만큼 탐이 났습니다. 그 정도로 공간에 흠뻑 빠져들어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습니다. 신중하게 고른 작은 원화와 엽서 몇 장을 사고 나오려는데 이렇게 좋은 공간을 가꾸어준 화가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행히 화가는 흔쾌히 사진을 함께 찍어주셨습니다.
다시 조용한 골목으로 돌아와 산책을 계속하며, 언젠가 나 또한 사람들에게 우연히 찾은 행운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우연히 길을 걷다 들어와, 따스한 기억 한 조각을 얻어갈 수 있는 공간을요.
여행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 그 공간의 기억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당시의 따스함을 그림에 담뿍 담아 부드러운 색으로 칠했어요.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던 순간의 호의를 기억하고 싶어 문가를 들여다보았던 순간을 그림으로 담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언젠가 나도'라 생각했던 그 순간은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은 안탈리아를 다녀온 후 3년이 흐른 2021년의 여름날이었습니다. '선녀정'이 위치했던 공간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고민 끝에 공간을 계약하게 되었어요. 회사를 다니며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터라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장소였습니다. 세모 지붕 아래 귀여운 조명을 달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과 나의 그림으로 채운다면, 정말 멋질 것 같았어요. 오래된 건물인 탓에 벽이 얇아 단열이 좋지 않고 누수까지 있는 곳이었지만 그렇게 첫 단독 작업실을 계약하게 되었습니다.
공간을 계약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난 여행의 많은 장소가 떠올랐어요. 그라나다의 쟈스민 향기가 나는 작은 방과 카디프의 스필러즈 레코드, 그리고 안탈리아의 작은 화실... 여행을 하며 막연히 '언젠가 나도'라고 생각했던 소망을 정말로 이룰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인테리어에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페인트칠부터 나무를 자르고 가구를 설치하는 것까지 직접 해내야 했습니다. 평일이면 회사가 끝나자마자 작업실로 향해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주말을 모두 바쳐 온종일 공간을 완성하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매일 근육통에 시달리고,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지만 그 모든 게 괜찮을 정도로 너무나 즐거운 시간들이었어요. 물론 모두 혼자 해야 했다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한눈에 모두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라도 정말 많은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하나의 공간을 채우기까지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여야하는 지 미처 알지 못했어요. 그렇게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어요. 드디어 나의 온도를 품은 공간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작업실을 오픈한 뒤로 꼭 일 년이 지났습니다. 여름에 시작해 가을, 겨울을 지나 봄 그리고 다시 여름. 모든 계절을 한 번씩 겪는 동안 많은 분들이 라잇풀 스튜디오를 찾아주셨어요. 한 해 동안 누군가에게 우연한 행운 같은 기쁨을 줄 수 있었기를, 같은 취향의 누군가에게 작은 즐거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공간을 가꾸었습니다. 언젠가 이 공간에서 쌓은 이야기들로 또 하나의 편지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오늘은 여기서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어요. 부디 그곳에서 건강하시기를.
가울 드림
매달 그림과 글을 한 편의 레터로 엮어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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