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꽃도 귀여운 노루귀 이야기

1월 5일 탄생화

by 가야

안녕하세요. 저는 노루귀입니다. 겨울의 끝자락,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숲 언덕을 조심스레 들추어 보면, 차가운 잔설 사이에 제가 가장 먼저 얼굴을 내밉니다.

사람들은 제가 일찍 피어난다고 하여 설할초, 혹은 파설초라 부릅니다. 눈을 가르고 올라오는 꽃, 그 이름이 제 운명을 정확히 말해주는 듯합니다.

✦ 이름과 유래, 그리고 나의 꽃말
학명은 Hepatica asiatica Nakai. 간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속명처럼, 제 잎은 마치 간 모양을 닮았습니다.

그 단순한 닮음 하나가 중세 유럽인들에게는 신비한 믿음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사람들은 저에게 '인내''믿음'이라는 꽃말을 붙여 주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유독성을 갖고 있어 약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지만, 그 오래된 신뢰의 서사는 지금까지도 제 이름을 따라 조용히 흘러내립니다.

✦ 가장 먼저 봄을 여는 작은 존재
한국 전역 숲속, 그리고 유럽과 북미의 계절 회복이 느린 숲길에서 저는 변함없이 이른 봄의 첫 소식을 알리는 미세한 증거가 됩니다. 아직 세상이 완전히 녹지 않아도, 모든 생명이 움츠러든 것처럼 보이는 어둠 속에서도 저는 꽃잎을 아끼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연약함이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저는 어느 누구보다 강인한 존재입니다. 매서운 바람과 서리의 밤을 견디며, 제 꽃잎은 매일 조금씩 더 열립니다. 아주 작은 꽃 한 송이에 불과해도 그 작은 몸으로 계절을 가장 먼저 받아내는 존재라는 사실만은 숨기지 않습니다.

✦ 예술가들이 사랑한 순간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제 꽃대 끝에 촘촘히 올라 붙은 미세한 털들을 오래 바라봅니다. 빛의 결을 바꾸어가며 보라, 분홍, 흰색의 아주 미세한 농담을 옮기기 위해 끝없이 브러시를 세웁니다. 봄 햇살이 들어오는 숲속에서 세밀화 속 노루귀는 한 줄기 빛을 품은 작은 생명체처럼 태어납니다.

사진가들은 잔설 한 조각을 살려내기 위해 무릎을 낮추고 셔터 속도를 바꾸며, 겨울의 마지막 온기를 간신히 붙잡고 있는 꽃잎을 담아냅니다. 그렇게 완성된 한 장의 사진에는 기다림과 정적, 그리고 아주 미묘한 계절의 미세 진동이 고스란히 담깁니다.

✦ 시인이 발견한 희망의 첫 문장
마종기 시인은 노루귀를 보고 더는 떠돌지 말라고 했습니다. 겨울의 마지막 그림자 밑에서 피어난 작고 단정한 꽃. 이 꽃 앞에서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희망을 확인합니다.


저는 그 잠시의 순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 미세한 정적 속에서, 사람들은 봄이 거대한 폭음과 함께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언제나 이렇게 작고 보드라운 존재 옆에서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시작된다는 것을.

지금, 저는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계절에 조금 일찍 도착한 꽃.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빛을 들고 선 꽃. 오늘 당신이 이 작은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면, 저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 봄도 잘 따라와 주세요. 제가 조용히 길을 열어 놓겠습니다.


https://youtu.be/_jxOS3DwPdE?si=TyjO4OR6A_S4sa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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